2003년 보라카이 소식(5)
13. 한국식당
본인은 김치가 없어도 별로 불편을 느끼지 않는데, 특히 외국에 나가 현지식을 먹으면 더 그렇다. 국내든 국외든 우리 음식을 먹고 있을 때는 김치가 있어야 덜 허전한데, 아마 습관이 되서 그런 모양이다.
그렇든 말든 어쩔 수 없이 한국식당을 가야 할 경우가 있는데, 그 첫째가 정보가 필요할 때, 둘째가 더 이상 먹을 만한 현지식이 없을 때, 셋째가 몸이 부실해지면 제일 처음 생각나는 것이 한국 음식이다.
어쨌든 내가 한국 음식점을 일부러 찾아다니는 스타일이 아닌데다가, 아내도 마찬가지로 빵만 있으면 행복감을 느끼는 스타일이라 한국음식점을 갈 일이 별도 없었다.
그래도 마닐라에서는 고려삼계탕이란 곳을 가서 식사를 해봤다. 고려삼계탕에서는 닭죽을 먹어봤는데 심야에 국제공항에 도착하여 출출해 하면서도 이른 아침에 일어나야 하는 부담을 덜기 위해 선택했다. 하나를 시켜 나눠먹었는데 맛은 기대했던 것보다 더 좋았다. 한가지 놀라운 사실은 그곳에 오는 사람의 대부분이 필리핀이나 중국인이고, 그네들은 불고기 위주로 먹는다는 것이다.
보라카이에서는 한국식당 다섯 곳을 보았고, 그 중 네 곳을 이용해 봤다.
가장 처음이 까띠끌란 공항 바로 앞에 있는 만남의 광장(영빈관)이었다. 처음 공항에 내려 바라보면 한글이 반가워서, 혹은 비행기 시간이 남아서 그곳에 들어가 죽치기 일수인데, 음식 맛은 거의 최악에 가깝고, 가격은 최상에 가깝다. 생수 가격이 호텔보다 더 비싸다. 게다가 화장실은 폼으로 설치한거나 마찬가지여서, 변기에 앉는 뚜껑이 없고, 급수시설도 부실하다. 남자야 서서 일을 보니까 그렇다 쳐도, 여자는 어떻게 일을 보고 손을 씻어야 하는지? 몇몇 필리핀 건물에도 그런 곳이 있다지만, 같은 동포를 상대로 질낮은 서비스를 제공하여 폭리를 도모하는 모습이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공항 바로 앞에는 그 식당 하나 밖에 없으니 필요하면 안 갈 수도 없고…
보라카이 리젠시 호텔에도 한식당이 있는데, 이것은 분리된 한식당이 아니라 1층 식당에 한식, 중국식, 일본식 코너를 하나씩 만들어 두고 통합해서 주문받고 서비스한다. 맛은 그냥 그럭저럭이지만, 여러가지 음식을 한곳에서 맛볼 수 있다는 점에서 편리하다.
저녁이 되면 백사장 코코넛나무 밑에다 야외 테이블을 깔고 손님을 받는데, 호객을 위해서 필리핀 남자가수가 어쿠스틱 기타를 연주해가며 생음악을 들려준다. 잔잔한 팝송 위주로 부르는데, 그 앞에 바구니나 하나 놓아두면 딱 어울리는 분위기다. 싫은 걸 억지로 노래한다는 모습이 역력하다. 리젠시에서 식사할 경우에는 얼른 밥 먹고 거기서 100m도 안되는 찰스바에 가서 속시원히 스트레스 해소함이 더 좋을 듯하다.
리젠시에서 100m 거리에 스테이션 2가 있는데, 그 직전에 서울식당이라는 한식당이 있다. 주인아주머니는 프로골퍼인 남편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혹은 골프의 전력이 있으신 분인지 모르지만, 골프에 빠져 사시는 분 같았다. 그래도 10년의 명성에 걸맞게 종업원들 체계가 잡혀있어서 주인이 있든 없든 음식맛이나 서비스는 상당히 뛰어났다. 특히, 자리에 앉으면 공짜로 보리찻물을 가져다 주는 것이 너무 반갑다.
저녁이면 백사장 테이블이 한국사람들로 미어터지는데, 주로 삼겹살이나 전골 또는 탕 종류를 먹기에 휴대용 가스렌지가 올라가 있는 모습이 매우 눈에 익다.
또 한곳은 투어리스트 센터와 뱀부 레스토랑 사이에 있는 것인데, 한글 간판은 없지만 안을 보면 닭똥집, 족발, 수육 등의 한글 현수막이 안쪽 벽을 커다랗게 장식하고 있다. 입구 우측은 몽골리안 뷔페가 차지하고 있으며, 그 뒤쪽은 일반적인 식사테이블, 좌측은 코코넛나무를 기둥 삼아 중간에 지붕을 매단 야외 칵테일 바와 테이블 몇 개가 있다. 우리는 몽골리안 뷔페만 먹어봤는데, 주인이 나오더니 한국 사람이 왔다고 조개국물을 내줘서 잘먹고 나왔다. 칵테일 바 바로 옆에는 잠수교육용 풀장이 있어 낮이든 밤이든 외국사람이 둘러앉아 맥주 한 병 앞에 두고 담소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자리가 없어 그들 옆에 앉아 돼지처럼 꾸역꾸역 먹기가 조금 뭐해서 조금만 먹고 나왔더니 왜 그리 돈이 아깝던지…
끝으로 못가본 한 곳은 해안로가 아니라 뒤쪽 트라이시클이 다니는 도로를 지나가면서 본 식당이다. 스테이션 1과 2 사이에 있는 허름한 식당인데, 도로 주위는 식당 종업원 등 가난한 현지인들이 사는 초라한 곳이어서 전혀 의외의 장소에서 한글간판을 발견하여 남다른 느낌이 들었다. 트라이시클이 다니는 길은 10년 된 1톤 트럭이 5톤 정도의 화물을 싣고 언덕길을 올라갈 때 그 배기구에 코를 대고 사는 것과 마찬가지일 정도로 매연이 심하다. 그런 곳에서 우리 한글로 쓰여진 조그만 식당을 보니 그 본질에 상관없이 마음이 조금 쓰렸다. 물론 그 길로 쭉 따라가서 딸리빠빠 시장을 지나면 보라카이에서도 남부럽지 않은 한국식료품점이 있기도 하지만 말이다. 이곳은 몇 번 지나다니며 쳐다보기만 했을 뿐 교통이 불편해서 가보지는 못했다.
비단 보라카이나 필리핀에서만 그런게 아니라, 해외에 가서 김치를 먹자면 충분한 대가를 지급할 각오를 해야 한다. 생수를 포함하여 점심 식사를 필리핀 음식으로 하면 110페소 이내, 저녁식사를 뷔페에서 해결하면 200페소 이내의 금액으로 배불리 먹을 수 있지만, 한국음식은 제일 싼 된장찌개 등이 250페소부터 시작한다. 물론, 뱀부에 가면 김치를 곁들인 저녁 뷔페가 185페소에 제공되어 밥값과 음료수 값으로 한끼가 해결되기도 하지만…
14. 음주
우리나라 사람처럼 술을 맛있게 먹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그 동안의 내 경험으로 체득한 사실이지만, 이곳 필리핀에서도 그걸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일본 출장길에 동료들은 선물을 사러 돌아다니고 나 혼자 왜색이 물씬 나는 조그만 술집에 들어가 술을 마시는데, 일단 메뉴를 보고 위에서부터 내려가며 술을 하나씩 시켜봤다. 데운 청주, 안데운 청주, 맥주, 드라이 비어 순으로 먹어 내려가면서 안주도 이것 저것을 시켜봤다. 안주라 해봤자 직경 10Cm도 안되는 접시에 두세 젓가락 분량이 나오는 것이기에 몇 개를 시켜도 간에 기별이 안간다. 그런데 다른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세 명이서 650ml 맥주 한 병과 안주 한 접시를 갖고 내가 들어갈 때부터 나올 때까지 고사를 지내고 있었다. 그 옆 자리들의 상황도 비슷하여 나 혼자 올려준 매상이 그네들 몇 테이블보다 많을 듯 하여 가난한 국민이 부자나라에 와서 돈을 물쓰듯 쓴다고 미안해 한 적이 있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서로 비켜가기 어려울 정도로 좁은 가게에서 뒷사람과 등을 마주대고 서서 단무지 접시만한 안주 한 접시와 한 병의 맥주나 정종대포 한잔을 앞에 두고 행복해 하는 술꾼들의 모습을 본 것도 일본에서였다.
필리핀은 백인을 통해 음주문화가 형성되었기에 일본보다 더 살벌하게 술을 마신다. 원래 동남아에서는 더운 기후 때문에 현지인들이 술을 잘 마시지 않는다. 따라서, 음주운전을 하는 경우가 드물다. 거기다 백인의 음주문화가 들어왔으니 그 술자리가 얼마나 삭막하겠는가?
일단 바나 레스토랑에서 술을 시키면 안주는 무조건 없다. 메뉴에도 우리처럼 안주용 음식이 없다. 단, 중국 음식은 이게 요린지 안주인지 구분이 없으니까 대충 넘어가자.
맥주 한 병이면 마시는 사람이 몇 시간이라도 즐길 수 있고, 마찬가지로 몇 시간을 끌어도 술집에서는 뭐라고 불평하지 않는다. 지난 10월 31일의 할로윈 데이는 카톨릭 국가인 필리핀에서 상당히 큰 명절이었다. 내 단골인 섹스레스토랑에서 백사장에 초대형 스피커를 설치하고 우리나라 난타와 비슷한 악극단을 수배해와 야외공연을 벌이자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는데, 그 곳 맨 앞에 맥주 한 병 달랑 시킨 사람들이 몇 시간씩 제일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공연을 지켜보고 있었다. 185페소 짜리 뷔페에 맥주 두 병을 먹은 내가 밥을 다 먹고도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게 미안해서 일어나야 하나? 하고 걱정스레 공연을 보고있는데 반하여, 맥주 한 병 시킨 백인들이나 필리핀 사람들은 아주 태연히 기념촬영하면서 음악을 즐기고 있었다.
취향이 까다로운 술꾼은 이 곳에서 좋은 대접을 받지 못한다. 위스키는 시바스 리걸이나 그보다 못한 조니 워커 래드 정도를 스트레이트로 마실 수 있는 곳도 드물다. 오로지 럼, 드라이 진, 보드카, 데킬라, 싸구려 위스키로 만들어내는 칵테일만을 마실 수 있다고 보면 된다. 그런 것도 한 두잔 마시면 술이 알딸딸하게 취해 올라온다. 맛과 향이 우리가 알던 칵테일과 다르니까 얼른 먹어 없앤다는 식으로 마셔서 그런지 혹은 안주가 없어서 그런지 평소보다 빨리 취한다.
혹시 인천공항 면세점에서 사온 양주가 남아 있으면 땅콩 한 봉지 사들고 단골 식당이나 bar로 가서 백사장의 제일 좋은 자리를 잡고 앉자. 그리고, 생수 한 병과 얼음이 든 유리잔 4개를 주문하자. 잔 두개는 물을 붓고, 잔 두개는 양주를 부어 둘이 건배하면서 마셔보자. 이 동네는 참 희안해서 물도 돈을 받고 제공하면서 얼음만큼은 돈을 안받는다. 얼음이 부족하면 더 달라고 해보자. 커다란 얼음그릇에 한가득 담아서 가져다 줄 것이다. 나오면서 팁을 조금 주면 고맙다고 인사하는 그네들이 오히려 나는 너무 고마웠다. 그 다음엔 소주와 돼지고기 꼬지구이를 사들고 간 적도 있었는데 그 때도 좋은 대접을 받았다.
역시 술은 한국식으로 마셔야 재미있다. 스테이션 2 앞의 서울식당에 가면 전부 다 앉아서 쐬주를 까고 있다. 테이블에는 삼겹살부터 생배추와 쌈장, 김치, 도라지무침, 땅콩무침, 마른멸치볶음 등의 부대 안주들이 즐비하게 쌓여 있다. 안주라고는 빈접시 하나 볼 수 없었던 바나 레스토랑을 보다가 서울식당에 가보면 여기는 완전히 별천지다.
스테이션 3 부근에 있는 일본인 운영 바에서 몇 번 술을 마신 적이 있다. 그 곳에서 전형적인 술꾼처럼 보이는 사람을 만난 적 있는데, 얼굴이나 몸매가 보리스 옐친 전 러시아 대통령의 외형 그대로 작달막하고 옆으로 퍼진 사람이었다. 하루 종일 맥주병을 끼고 사는 것처럼 보였으나 자세히 보면 그 사람이 마시는 건 어쩌다 한번 입을 축일 정도의 양 밖에 안되어 실제적인 하루 음주량은 내 한시간 음주량도 안될 듯이 보였다. 그래도 서로가 술친구라고 하여 볼 때마다 반갑게 인사하고 대화를 나눴는데, 밤 늦게까지 아내와 함께 맥주 한 병과 칵테일 한잔을 앞에 놓고 대화하는 모습과, 아침 일찍 어린 딸과 함께 물에서 놀아주는 모습이 보기에 참 좋았다. 그런 음주습관을 보고 어떤 악처가 술 끊으라고 목에 핏대를 올리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