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lapascua
1995년 경이었습니다.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이어지는, 아무도 믿지 못할만큼의 살인적인 업무량과 수시로 술자리로 끌고가는 윗사람들... 주말은 잊은지가 오래였고, 바쁜 업무시간을 보충하기 위해 담배도 끊고, 쓰라린 속을 달래기 위해 아침에 몰래 도망가서 먹던 라면과 밥 한공기의 유혹을 이기기 위해 아침도 끊어야만 했습니다. 그 정도로 바빴죠. 심지어 옆자리 동료의 미진한 업무를 대신 처리하기 위해서 1주일간 부장의 감시하에 철야작업도 해봤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문득 눈에 들어온 이름. 끌라이 깡원...
태국에 있는 후아힌이라는 휴양지의 별칭입니다. 뜻은 "걱정은 저 멀리에..."
후아힌에는 왕실 여름별장이 있습니다. 국왕에게 국정과 관련된 모든 근심과 걱정은 잊고 휴가를 즐기다 가라는 의미에서 붙여준 이름이라고 하네요. 뭐 그만큼 경치가 아름답다는 의미이기도 하고요.
그 글을 읽는 동안 걱정을 잊을만큼 아름답다니 도대체 얼마나 아름답기에라는 생각이 들어, 이후 끌라이 깡원은 제 머리속에 항상 자리하게 되었고, 1997년 겨울에 바탕화면에 글씨를 넣을 수 있는 휴대폰이 등장했을 때부터 몇년간 항상 끌라이 깡원이란 이름은 제 눈에 가장 잘 들어오는 위치에 놓여있었습니다.
2003년 12월에 마침내 방콕을 자유여행하게 되었고, 생각보다 추운 기후에 어쩔 수 없이 후아힌과 푸켓을 잇는 육로여행을 가게되면서 예기치 못했던 겨울방문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동해안과 같은 삭막한 바다와 평야지대에서 느끼는 허망함, 쌀쌀함에 아무도 뛰어 들지 않는 바다물 등만을 느끼고는 다시 따뜻한 바다를 찾아 푸켓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차라리 그냥 꿈으로나 남겨놨으면, 혹은 여름에 방문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이 많이 남아있죠.
태국을 방문하기 두달전에 보라카이에 놀러가서 23일간이나 빈둥대며 놀다 왔으니 아마도 실망이 더 컸을 것입니다. 아침저녁으로 물속에서 자맥질하고 20리 가까운 산호모래를 밟으며 산책을 즐기던 사람에게 후아힌과 푸켓은 별로 매력이 없는 곳이더군요.
2007년까지 보라카이를 4번 방문했습니다. 2004년에는 어머님도 모시고 15일간 방문하기도 했었지만, 2007년의 방문을 끝으로 더 이상의 보라카이 방문은 자제하려고 합니다. 지나치게 많은 사람과 빽빽한 건물, 그로인해 다 죽어버린 산호...
2004년 경부터 끌라이 깡원을 대신하여 제 마음속에 자리잡기 시작한 이름이 있습니다. 바로 말라파스쿠아죠. 말라파스쿠아도 후아힌처럼 애칭을 갖고 있는데, 제가 생각하기에는 별로 좋은 애칭이 아닙니다. 리틀 보라카이라 하죠.
지난 1월 하순에 이곳 세부로 옮겨 온 이후로 수시로 말라파스쿠아를 방문하고자 했습니다만 항상 제 뜻대로 안되더군요. 바로 옆의 반타얀까지는 다녀왔는데 말입니다. 일정이 잡히고 나면 자동차사고가 나고, 배탈이 나고, 동행하고자 했던 사람에게 문제가 생기고...
7월 하순의 어느날 곰곰해 생각해보니 컴퓨터 모니터에 너무 오랫동안 눈이 고정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어 바로 특단의 조치를 내렸습니다. 말라파스쿠아행이라는...
잘다니던 직장도 5분이나 10분간의 고민 끝에 그만두기를 몇번 했었는데 그까짓 여행이야 뭐 식은 죽먹기죠. 그래서 즉시 돈을 만들어 월말 공과금 등을 납부하고는 어느날 새벽에 말라파스쿠아로 향했습니다.
세부에서 말라파스쿠아로 가는 방법은 육로로 Maya(마야)까지 이동한 다음에 방카보트로 약 45분간 이동하여 건너가면 됩니다. 육로이동이야 자가용 이용, 택시 대절, 북부터미널에서 봉고나 카니발류 대절 혹은 합승, 일반버스, 에어컨버스를 이용하는 방법 등 다양한 방법이 있는데, 저는 에어컨버스를 이용하였습니다. 두시간 마다 한대씩 정각에 출발하는 것으로 되어 있더군요. 이동시간은 4시간 정도 소요되고 비용은 170페소.
택시를 이용하면 대충 한시간 가까이 시간을 단축할 수가 있지만 비용이 많이 비싸고(택시로 가는데 3천페소, 올 때는 카니발 대절이 1,500페소), 과속운전이 조금 불안하죠.
에어컨버스는 먼지 하나 없을 정도로 깨끗하고 쾌적하기에, 또 비수기여서 승객도 10명 남짓, 그것도 중간에 몇명은 하차, 목숨이 경각에 달린 사람이 아니라면 에어컨버스 이용을 권합니다. 시내에서 터미널까지 가는 택시비가 200페소 정도 나오더군요. ㅎㅎ
마야에서 말라파스쿠아간의 방카는 오후 2시까지는 매 정각과 30분마다 한대씩 다니고(80페소), 파도가 높아서 방카가 접안하기 어려우면 소형보트가 방카와 해변까지 연결을 해주는데 한쪽을 이용하는데 각각 20페소씩 요구합니다. 어쨋거나 예닐곱명을 태우고 45분 정도를 달려봤자 600페소 안쪽인데, 기름값이나 나올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이네들이 권장하는 것이 스페샬 보트... 방카보트 한척당 최고 대절료가 1,200페소(정부에서 정한 강제사항)지만 일인당 200페소씩을 불러 여러명을 한꺼번에 태우는 합승의 방법으로 그 규정을 피해나가더군요. 똑같은 보트를 갖고서 자기차례가 되면 정규편이되고, 남의 차례에 앞서 손님을 꿰차고 나가면 스페셜보트로 이름만 바꿔서 바가지를 씌우려 하더군요. 그래봤자 큰돈이 안드니 너무 고민하지 않는게 정신건강에 유리합니다.
일단 말라파스쿠아에 들어가면 그 다음이야 예전의 보라카이랑 동일합니다. 해변이든 뒷쪽이든 혹은 다른 해변을 돌아다니며 방을 구하고, 식당을 기웃거리고, 푹 쉬다가 오기만하면 되죠.
한가지 희소식은 일년여전에 발전소가 생겨서 더 이상 전기걱정없이 밤을 맞이해도 된다는 것이지만 손전등은 필요하더군요. 아직 가로등이 많지 않아서...
나쁜 소식은, 전기료가 다른 지역에 비해 엄청나게 비싸서, 팬(FAN, 선풍기)룸과 에어컨룸의 가격차이가 비치 프론트 카티지는 700페소(2,400페소 대 1,700페소) 정도, 해변 뒷쪽 리조트의 경우에는 400페소(1,200페소 대 800페소) 정도나 크게 격차를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야 뭐 에어컨 없이 사는 것에 익숙해서 무조건 팬룸인데, 이 경우에는 동일한 방을 배정해주고는 에어컨 사용만 못하게 외부에서 전원을 차단하더군요. 그래서 에어컨 외의 모든 것은 동일합니다.
말라파스쿠아의 장점은 이동의 불편함 때문에 제한된 인원만 장기휴가로 방문하다보니 참 한산하고 아름답습니다. 주말이 되면 세부에서 공부하는 한국인 단체관광객들이 하룻밤씩 머물고 가는 것 외에는 이렇다할 단체관광객도 없고, 보라카이처럼 단체관광객들을 수용할 대형 숙박시설도 없습니다.
밤 9시 이후, 특히 10시에서 12시 사이에는 해변의 한쪽 구석이 많이 시끄럽습니다. 백사장 디스코(나이트클럽)가 영업을 하고 있는데, 디스코는 무료라서 식당과 리조트에서 근무를 마친 종업원들이 죄다 모여서 흔들어 댑니다. 외국인들도 몇몇이 들러서 산미겔 필센 한병과 춤을 간단히 즐기기도 하는데, 다이버 강사과정정도의 난이도가 높아보이는 교재들을 펴놓고 낮에 공부하는 모습이 보이는 것을 보면 한두달 머물면서 다이버로서 끝장을 보고 떠나갈 사람들 같았습니다.
식당은 해변가에 위치한 리조트 부속 식당들과 뒷편의 Ging Ging Restaurant으로 대별되는데, 해변식당들은 깅깅에 비하여 조금 비싸지만 맛있고 안락합니다. 위스키 종류 등의 독주가 메뉴에 없어서 술꾼이 반주를 즐길 수 없다는 것이 조금 불만이지만, 사리사리에서 탄두아이를 사들고가서 생수와 얼음을 부탁하면서 사정을 설명하니 알았다며 얼음을 한컵 가득 가져다 주고, 떨어져서 더 달라면 바로 바로 가져다 주더군요. 방에 마시다 남은 양주 있으면 가져가서 마셔도 되겠더군요.
깅깅은 뒷골목에 있는 나름대로 유명한 식당으로 몇몇이 추천하여 세번 가봤는데, 낮에는 파리가 너무 많아서 별로고 파리가 잠든 저녁에는 그럭저럭 모기만 조심하면 먹을만 했습니다만, 비수기여서인지 떨어진 요리재료가 많아 별 감흥을 못느꼈습니다. 단지 메뉴에 탄두아이가 들어있어서 싼 맛에 즐기려고 하루 저녁은 특별히 맘먹고 들른 적이 있죠. 술이 조금 들어가니 기분이 좋아서 개들에게 먹거리를 던져주며 장난도 치고 My sweet lady, The water is wide 등을 조용히 불러주니 옆자리 손님들 중 백인 미인 둘이서 황홀한 미소로 수시로 박수를 날려주기에 술값을 다 뽑고 나올 수 있었습니다. 한번 대쉬해봤어야 했는데... ㅎㅎㅎ
말라파스쿠아의 장점 중 하나는 최근 몇년 사이에 해변로를 정비하였기에 보행자가 상당히 편안하다는 것입니다.
사진에서 보이는 담장과 그로부터 약 3m 정도 떨어진 도로표지석 사이가 해변로이며, 해변로로 지정된 곳에 설치된 모든 건물을 허물고 후퇴하게끔 강제했기에, 대부분의 리조트가 신축건물이며, 사진에서 보다시피 해변로에는 아직도 야자수가 남아 있기도 합니다.
보라카이도 같은 시스템이죠. 해변로로는 청소차와 경찰차를 제외한 모든 내연기관의 차량은 다닐 수가 없게 되어있죠. 메인로드에서 해변로까지 연결되는 접속도로까지만 트라이시클이 들어갈 수 있는데, 말라파스쿠아는 트라이시클도 없고 자동차도 없으니 그냥 오토바이 금지도로 정도가 맞겠네요.
말라파스쿠아는 도보로 1시간이면 대부분의 리조트가 몰려있는 남쪽의 Bounty 비치에서 섬의 북쪽 끝까지 걸어갈 수 있습니다. 섬의 서북쪽 끝에 있는 Los Bamboos 리조트는 문을 닫았으니 참고하시고요.
섬의 서북쪽 끝에 있는 Los Bamboos 리조트(백사장 왼편)
Los Bamboos 리조트를 북쪽에서 바라본 모습
독인인 약혼자 커플과 함께 호핑을 하면서 느낀 것은, 말라파스쿠아에는 단순히 스노클링만을 즐기는 초보자에게는 별로 권장할 만한 산호군락지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한곳에 조금 발달된 곳이 있기는 있었지만, 조류가 워낙 세서 독일인이 내려서 깝작거리다가 물몇모금 먹었는지 배를 잡고 힘들어하더군요. 그래서 저혼자 빵을 물에 풀어서 물고기들과 놀았는데 힘이 약한 여자나 수영에 익숙치 않은 사람들에게는 권장할 활동이 안되더군요.
그 유명한 환도상어나 만타가오리, 바다물뱀 등은 스쿠버 다이빙으로만 관찰할 수 있으며, 다이버들이 9 ~10월에 가장 왕성하게 방문한다고 합니다. 스쿠버 다이빙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없는 시간이라도 한번 내어서 방문해보는 것도 의미 있다고 생각되는군요.
저는 6년에 걸쳐 NAUI 오픈워터를 두번 이수했지만 여전히 자격증이 제 손에 도착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한국인 다이버샾이 있으면 상황을 설명하고 펀다이빙을 하려고 했지만, 한국인 다이버샾을 발견하지 못한 이유로 5박 6일간 먹고, 자고, 쉬고, 놀고, 마시다 돌아왔습니다.
글을 작성하다보면 어디서 멈춰야할지가 제일 걱정인데, 어김없이 오늘도 대용량이군요. 끝으로 눈요기로 사진이나 몇장...
코코넛 씨앗을 발아시켜서...
요렇게 옮겨 심습니다. 몰랐죠? ㅎㅎㅎ
파파야도 씨를 뿌려두면 저렇게 싹이 돋아나 자라나고요. 얼마 안있어 열매를 맺을만큼 자라난답니다.
그렇게 해서 자라난 코코넛 나무가 저렇게 백사장을 지켜주고 있습니다.
끝으로... 사람은 항상 내가 현재 있는 곳보다 내가 없는 곳 또는 아닌 것으로 옮겨가고 싶어합니다. 다른 사람이 부러워하는 바로 그곳에 내가 위치해 있는줄도 모르고요. 저 또한 그러하죠. 단지 위안이라면 우리네 인생이란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고, 그래서 각자가 원하는 대로 의미를 부여해가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죠.
오늘도 저는 꿈꿉니다. 북극의 오로라, 남미대륙의 이과수폭포, 엔젤폭포, 우유니소금사막, 에베레스트산, 아프리카 사막에서의 일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