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관련

창조에 관하여...

호린(JORRIN) 2012. 1. 22. 01:40

우리는 3성의 존재입니다. 

초의식, 의식, 잠재의식이라고 부를 수 있고 영혼, 정신, 몸으로 나눌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창조력입니다. 

창조의 도구로는 생각, 말, 행동이 있으며 창조에는 우리의 3성의 부분이 모두 관여를 합니다.


제가 항상 궁금했던 점은 

"우리가 우리 삶의 창조자라면 왜 우리가 의식적으로 선택하지 않은 전혀 예상치 못한 사건이 튀어나오는가?"

였습니다.


신나이 1,2,3권에 종종 언급되는 물질계만이 가지는 '창조와 체험간의 딜레이(시간적 환상)'이 비단 우리가 창조자라는 것을 잊게 했다고 책에 나왔지만 제 개인 인생체험에서 20년이 넘도록 본인의 생각이 삶을 창조한다는 티끌만한 감도 잡지 못한 이유가 바로 의도하지도 않은 전혀 예상치 못한 사건이 삶에서 튀어나온다는 것 입니다.


처음에는 '삶은 우발적이고 통제할 수 없다는 믿음이 창조력에 작용해서' 이런 무작위적인 사건들이 벌어진다고 생각했으나 

창조력을 인지하고 2년간 생각 조절 등 적용을 해봤지만

비단 하루 일과만 하더라도 100% 의식적 차원에서 창조했다고 보기 어려운 사건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계속 책을 음미해본 결과 저는 신나이 1,2,3권의 부분에서 언급한 것들과 <신과 나누는 우정>, <신과 집으로>에서 가장 유력한 이유를 찾았습니다.


그것은 잠재의식, 의식, 초의식에 있어서 초의식과 잠재의식의 차원에서 창조되는 일을 의식적으로 자각하지 못 할 때 우리는 의식적으로 창조하지 않은 일을 체험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신나이 1,2,3권 시리즈 중 한 부분에서 대충 '그것은 너희의 잠재의식이라 불리는 부분이 불러온 것으로 너희가 의식적으로는 자각하지 못하는 것일 수 있다. 다만 네가 원한다면 그것을 네가 창조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라는 뉘앙스로 신이 말했으며


팔레트에 짜놓는 물감에 비유하며 영혼이 조건이나 환경, 그리고 몇몇 사건들을 미리 정해놓는다는 말도 했습니다.


또한 영혼은 참된 자신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치유하고 체험하기 위해서 본능적으로 어울리는 환경을 추구한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이 약속한 창조의 다른 부분들과 충돌되어 모순이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첫번째, 운명론과 관련된 티켓을 구매하지 말라던 신의 말. 즉 미래는 백지다라는 신의 말.


두번째, 우리는 자유의지를 선물 받았다는 신의 말.


세번째, 우리는 무엇이든 원하는 것이 될 수 있고 할 수 있고 가질 수 있다던 신의 말.


네번째, 영혼은 어떠한 욕구도 없기에 그것의 의지를 강요하지 않을 것이라던 신의 말.


그러나 <신과 집으로>와 <신과 나눈 우정>을 읽고 난 뒤 느낀 뉘앙스로는 마치 초의식이 이번 삶에서 체험하고 기억해내기 위해 스스로 선택한 이번 물질계의 삶의 과정에 반하는 의식, 또는 에고의 선택은 깡그리 무시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영혼이 어떠한 욕구도 없기에 그것의 의지를 강요하지 않는다면서 정작 의식적 선택에 대한 의식부분에서의 창조를 깡그리 무시하고 초의식적 창조가 현실에 반영되는 것이 어찌 모순이 아닐 수 있으며


애초에 영혼이 물질계의 삶에서 어떤 과정을 수행하기 위해 물질계로 돌아오고, 영혼이 체험하려던 모든 것을 다 체험하기 전까지 죽지 않는다면 사실상 그것이 이미 정해졌다는 취지의 운명론과 뭐가 다르며


애초에 영혼이 삶에서 수행하려던 것과 반하는 모든 '될 수 있고, 가질 수 있고, 할 수 있는' 선택의 경우의 수가 무시당한다면 세번째 약속도 모순이 되며


사실상 초의식(1,2,3시리즈에서 '수뇌부'로 표현된, '사실상 삶을 운영하고 창조하던 부분')이 3성의 부분 중 무소불위의 영향력을 휘두른다면 당최 우리가 무슨 자유의지가 있다는 말입니까?


신은 우리가 그곳에 있어도 알지 못한다면 그곳에 있는 체험을 하지 못 한다는 식의 비유를 한 것 같은데 사실상 초의식은 의식을 초월한 상태인데, 우리가 우리의 자유의지를 의식차원에서 경험하지 못하는 판국에 자각도 안되는 초의식이나 잠재의식차원의 창조가 멋대로 판을 치고 의식적 창조까지 침해한다면 백날 자유의지가 있다고 우겨봤자 유명무실한 것이 아니잖습니까?


고작 우리가 가진 자유의지라는게 영혼이 예약해놓은 객관적 사건에 대해 '완벽'을 볼지 '그렇지 않을지'를 선택할 자유를 가진다는 의미인지요?


우리가 삶에서 일어날 사건들이 이미 영혼에 의해 좌우된다면 당최 생각,말,행동의 의식차원의 창조도구가 무슨 놈의 쓸모가 있으며 

막말로 영혼이 어떤 체험과 성장을 위해 삶의 태반을 '알 거지로 사는 삶'을 선택했다면 그 사람이 백 날 의식의 3가지 창조도구인 생각 말 행동을 조절한다한들 소용없는거 아닙니까?


이거야 말로 운명론적 사고고, 무늬만 자유의지고, 창조력이죠.


특히 <신과 나눈 우정>에서 신이 동의할 수 없는 상황을 받아들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너희의 외부상황은 바뀌지 않겠지만 내면체험을 바꿈으로써 체험을 바꾼다라고 표현했는데, 사실상 말만 번지르르하지 '운명에 긍정적으로 순응하라'라는 말과 뭐가 다릅니까?


초의식, 의식, 잠재의식이 모두 하나가 되어 움직이는 초월의식에 대해서도 사실상 문맥으로 보아선 이 셋이 하나가 되는 것이 초의식의 취향에 의식과 잠재의식이 따라준다는 느낌이 강한데, 영혼이 삶을 거치며 '기억해내기 위해' 배치시킨 여러가지 사건들과 삶 속에서 자아를 가진 에고단위 개체로써 , 말 그대로 Live로 막상 삶 속을 진행하면서 새로이 체험하고 싶은 것과 충돌하면 영혼이 제멋대로 한다는 사례들이 많아보이는데요.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암에 걸린 사례나 죽는 사례등이요. 심지어 닐 도널드 월쉬 본인도 본인의 의식적 의지로 노숙자가 된 것이 아니었는데 말이죠.


닐의 영혼의 여정상 닐이 노숙자가 되는 사건이라는 것이 궤짝을 짜기 위한 도구들 모음에 추가가 되어있어단 말인데 닐이 일찍이 이 모든 것들을 알았다면 그것을 피할 수 있어야 우리의 자유의지가 말이 되는거 아닙니까?


우주가 CD-ROM이라면 닐이 다른 체험을 고를 수도 있는 것 아닌가요.


<신과 집으로>와 <신과 나누는 우정>을 읽은 뒤로 이 우주라는 CD로 하는 삶이라는 게임이 대충 테마라는 틀만, 가령 어느 시대에 어느 나라에서 어떤 성으로 어떤 부모아래 등만 정해져서 나오고 무한히 자유도를 가진 게임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상 위 두 권의 책을 읽은 뒤로는 무슨 콜오브듀티같은 게임처럼 정해진 코스를 밟으면서 그 한계 내에서 고작 꺠작거리는 수준의 게임으로 인식이 되네요.


당최 이게 뭐가 자유의지고, should 따위는 없는 것이며, 신의 사랑입니까?

매우 혼란스럽습니다. 뭐가 뭔지. 어디를 이해를 잘 못한 것인지. 도와주세요.


전 지금 자유를 박탈당하고 제한당한 기분이 들어서 무지 화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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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인생을 탐구하는 학생으로서 모처럼 재미있는 대화주제를 발견하게 되어 기쁩니다.



대화의 주제를 압축하고 있는 문장을 선택하라면,


"우리가 우리 삶의 창조자라면 왜 우리가 의식적으로 선택하지 않은 전혀 예상치 못한 사건이 튀어나오는가?"가 되겠죠.



아시다시피 인간은 육체와 마음과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죠.


그 중에서 가장 주동적인 것을 꼽으라면 아무래도 영혼이겠지만, 기실 육체가 없으면 체험할 수 없고, 자아가 없으면 아무 것도 의식적으로 행할 수 없으니, 우리가 삶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어느 한가지라도 덜 중요한 것은 없겠네요.


우리는 자아, 마음, 정신 혹은 의식이라고 불려질 수 있는 무형의 것이 육체에 기반을 두고 영혼의 감응을 받아 살아가고 있으므로, 이곳에서는 "나"란 것이 육체나 영혼이 아니라 자아, 마음, 의식 혹은 정신을 뜻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이야기를 해보죠.


"나"라는 존재와 관련하여 토론에 앞서 두가지 고려해야할 사항이 있습니다.


우선, 영혼이 실질적인 삶의 주인공이라는 것이죠. 영혼이 뭔가를 체험하기 위해서 육체와 결합하였고, 그 뭔가를 체험하고 그 결과물인 느낌을 전달받기 위해 육체와의 연결고리로 활용되는 것이 마음이다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뭔가를 체험하기 위해 영혼은 물리적 환경, 즉 인과의 장 속에서 활동할 수 있는 물질적 존재인 육체를 활용하는데, 이 육체라는 것은 물리적 제약을 갖고 있기에 자유의지와 창조라는 단어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그 물질적 한계를 거의 뛰어넘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두가지 고려사항을 기반으로 자유의지와 창조능력에 대해 생각해보면, 영혼이 육체와 결합하기 이전에 이미 목적의식을 갖고 있었고, 설령 삶이 영혼에게는 완벽이며 자유의지의 표현으로 보여진다 하더라도, "자아"인 "나"에게도 그것이 자유의지로 이뤄지는 창조적 삶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 이번 토론의 주제죠.


저로서는 그 대답이 그렇다는 것이 제 판단입니다.



저는 인간을 자동차(혹은 오토바이), 운전자 및 탑승자로서 비유하여 이해하곤 합니다. 여기서도 육체는 자동차, 마음은 운전자, 탑승자는 영혼으로 비유하여 이야기를 펼쳐보죠.


탑승자가 운전기사에게 운전기사가 전혀 가본 적 없는 서울 강북의 어느 복잡한 곳으로 갈 것을 지시하고 뒷자리에 앉아 딴전을 피우고 있다면, 운전기사에게 그 목적지는 불변의 사실이지만 그 과정 즉, 경로는 운전기사의 선택이죠. 선택한 길이 막히고 돌아가고 끼어들고 하면서 운전기사가 짜증을 부리면 탑승자가 한번씩 운전기사가 목적지를 제대로 찾아가고 있는지 확인은 하겠지만, 경로선택, 추월, 차선변경, 신호위반 등 그 과정만큼은 운전기사의 선택입니다.


그런데, 운전기사가 아무리 신출귀몰하는 운전실력을 갖췄다 하더라도 할 수 없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역주행이라든지, 주행 중 갑자기 후진을 한다든지, 엔진 능력 이상을 요구하는 속력이라든지, 설계기준을 아주 초과한 화물적재, 길이 없는 곳에서의 질주 등 자동차의 물리적 특성을 뛰어넘는 능력은 발휘할 수가 없겠죠.


이 말은, "나"는 자유의지를 갖고 의식적으로 창조하는 주체이지만, 영혼과 육체라는 두가지 제약조건의 틀 속에서만 그 자유의지의 발산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즉, "나"는 무한한 자유의지를 갖고 창조적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영혼의 목적을 수행하려는 잠재의식과 육체적 한계를 인정해야하는 물리적 현실의 두 가지와 조화되는 삶을 전제하지 않고는 존재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죠.


그런데, 영혼이 가고자 하는 목적지는 다행히도 아무 곳도 없습니다. 영혼은 "나"가 현재 존재하고 있는 곳이 바로 목적지이자 출발지이고, 신과 만나는 지점이자 신과 떨어져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곳이란 것을 운전기사가 체험으로 알 것을 요구하고 있죠. "나"가 행하는 것이 영혼의 본질 혹은 목적과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에 적합한 느낌을 "나"에게 제공함으로써 목적지가 어디라는 것을 잃지 않도록 하는 정도의 견제만 하고요.


신과 모든 영혼이 하나라고 한다면, 구태여 내 영혼이 다른 영혼과 서로 협의하여 우리 삶의 사건들을 순간순간 조정하는 그런 식으로 우리네 삶에 개입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이기에 동시에 모든 일이 이뤄졌고, 이뤄지고있고, 이뤄지겠죠.


만약에 영혼과 육체의 결합을 관리하는 중간자로서의 "나" 즉 자아의 근본적인 탄생원인조차 부정하고 무한한 자유의지를 갖겠다는 것은 영혼 그 자체로 돌아가겠다는 선택이며, 그 존재 상태에서는 무한한 창조능력과 생각의 속도로 창조가 이뤄지는 것을 체험할 수 있겠죠.



다음 문제는 내가 의식적으로 창조하지 않은 상황이 내게 주어지는 것이 과연 내 자유의지와 관련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영혼의 관점에서야 당연히 그렇다고 할 것이고 육체적 관점에서는 모든 것이 물리적 능력이나 한계와 관련되므로, 이것도 역시 "나"만의 관점에서만 고려해보죠.


돌발적인 사고는 물리적 인과관계가 적용되는 현실에서 "나"의 인식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죠.


내가 사전에 정확한 데이터를 갖게되었다면 결코 받아들이지 않아도 될 사건이 "나"에게 벌어진 것이지, 내가 모든 정보를 다 갖고 있고, 그것을 충분히 분석하고 준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건이 발생한 것은 아닙니다.


만약에 인간의 과학기술이 발전하여 일기를 적절히 조절하고, 자연재해를 미리 예측이나 통제할 수 있고, 모든 것이 풍부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여 모두가 필요한만큼 마음놓고 누릴 수 있는 사회가 된다면 사건사고라 불리워질만한 것이 대부분 없어지겠죠.


게다가 "나"는 그 사건을 사건으로 인식할 수도 있고, 아무 것도 없었던 것인 양 인지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산속에서 뭔가를 찾겠다며 목숨 걸고 도를 닦던 이에게 IMF나 금융위기는 전혀 인지할 수 없는 일이죠. 심지어 뻥인지 모르겠지만, 장기를 두면서 화타로부터 뼈를 깍아내는 수술을 받고, 게다가 단 한번도 인상을 찌푸린 적이 없다는 중국소설 속의 인물이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둔 것이라면, 우리가 인식이라는 것과 사건이라는 것의 상관관계를 잘 알 수가 있죠.


"나"는 내 주위에 있는, 발생한 혹은 발생할 모든 것을 선택적으로 인지하고 있습니다.겨울을 지나 초여름이 될 때까지 미처 모르고 지나치다가 어느날 우연히 날마다 지나는 곳에 꽃이 폈다가 이미 시들고 있는 것을 인지하기 전까지는 그곳에 무엇이 있든지 "나"는 그 정보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내게 일어나는 외부적 사건도 내 인지 혹은 인식이 선택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내게 아예 발생하지도 않은 것입니다. 따라서, 나는 어떠한 경우에라도 나와 관련된 모든 것을 자유의지를 갖고 창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 내게 어떤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내가 스스로 선택하여 그것을 인지하고, 평가하였다는 뜻입니다. 만약에 내가 그 사실을 인지하지 않았다거나, 혹은 인지하였더라도 그 의미를 축소하였다면 그 사건은 "나"에게 전혀 불행한 일이 아닌 것이죠.


누가 대통령이 되든 상관이 없는 사람에게는 쥐박이가 되든 발끈해되든 대통령의 존재가 자신에게는 의미있는 사건이 되지 않습니다. 극단적인 예로, 차에서 자고 있다가 교통사고로 즉사한 사람의 경우에 그 사람의 "나"는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였으므로 그 사실이 그 "나"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제가 생각하기에, "나"는 어떠한 경우에라도 내 삶을 자유의지를 갖고 창조하고 있습니다. 비록 육체라는 물리적 한계와 영혼이라는 목적지향적 존재의 통제를 받고 있다고 하더라도, 밥을 먹을 것이냐 집안 청소를 할 것이냐 등 매 순간이 내가 선택하고 그 선택결과를 행위로 완성하여 "나"라는 존재에 대하여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제약조건처럼 보이는 것이 바로 누군가가 생각하는 원죄 혹은 업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드는군요.


어쨌거나, "나"는 나 자신에 대한 체험을 혼자 할 수 없습니다. 비교대상인 객체가 있어야죠. 하얀 벽에 찍혀 있는 검은 점 하나라든지, 작고 귀여운 고양이라든지 하여튼 비교할 무엇인가가 있어야 "나"라는 것을 체험할 수가 있죠.


고스톱 칠 때도 규칙이 있어야 재미가 있지, 내놓고 가져가고 싶은데로 가져가고 그 결과에 대한 보상도 없다면 무슨 재미로 고스톱을 치겠어요?


그리고, 전문도박꾼이 아닌 다음에야 쓰리고를 노리며 똥 쌍피를 먹다가 설사했다고 해서 그것을 재미로 보지 않고 불행으로 보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어요?


우리 인생이 바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면 마치 삶을 밑천삼아 내기를 일삼는 도박꾼처럼 내 주위에 발생하는 사소한 사건도 인식하여 불행해하고 낙담하기 마련일 것입니다.


우리 인생 최대의 축복이 바로 우리 인생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각자가 자기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에 걸맞는 색칠을 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런 의미 없는 인생에 너무 많은 그림을 그려놓고 나서는, 그것이 무엇을 그린 그림인지 알아내려고 온갖 억측과 불행하다는 마음과 좌절을 맛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