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참여(펌글 모음)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호린(JORRIN)
2013. 9. 22. 14:52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130813165715
"공산군 물리친 이승만의 공? 잘한 게 없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 한국전쟁, 첫 번째 마당
김덕련 기자, 최하얀 기자
기사입력 2013-08-14 오전 9:48:14
이러한 생각으로 새 연재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시작한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첫 번째 이야기 주제는 한국전쟁이다. 6일 서 이사장 연구실에서 2시간 40분에 걸쳐 인터뷰하고, 그 후 전화로 추가 질의응답을 했다. 그 내용을 세 편으로 나눠 전한다. <편집자>
프레시안 : 한국전쟁과 관련해 이승만 전 대통령의 업적을 인정해야 한다는 의견을 때때로 듣는다. 한국전쟁 때 공산군을 물리치지 못했다면 자유민주주의를 누리며 북한보다 훨씬 잘사는 오늘의 한국은 없었을 것이고, 따라서 전쟁을 겪으면서도 국가를 유지한 '국부(國父)' 이 전 대통령의 공이 크다는 의견이다. 온라인 공간에서는 적화 통일을 막아낸 이 전 대통령에게 감사해야 한다는 의견도 접할 수 있다. 단정 수립이 그 당시 현실적으로 올바른 선택이었다는 주장과 맥이 닿는 의견이다. 더불어 미국에 감사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서중석 : 한국전쟁엔 특이한 면이 있다. 피스톤 전쟁, 대패 전쟁이라고도 불렸는데 뭐냐 하면 불쑥불쑥 밀고 당기는 식의 전쟁이었다. 국군과 유엔군이 순식간에 낙동강 한 귀퉁이만 빼놓고 다 밀려난 적이 있는가 하면, 한때는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북한이 일패도지해서 밀려났다. 그랬다가 또 그렇게 막강하다는 미군이 중국군한테 그야말로 어떻게 패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동계 전투에서 대패하고 한강 이남으로 밀리는 일도 생겼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도 굉장히 큰 희생이 일어나게 된 거다. 그런데 이 전쟁을 가만히 보면, 이승만 정권이나 미국이 제대로 대응했다면 전쟁이 중부 전선에 머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랬으면 그렇게까지 큰 피해는 없었을 것이고, 전혀 다른 의미의 한국전쟁으로 기억됐을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이나 미국의 대응엔 문제가 많았다.
프레시안 : 미국의 대응에서 어떤 점이 문제였다고 보나.
서중석 : 1950년 5월 하순부터 6월 25일까지 북한에서 군과 물자가 집중적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왜 미국이 이에 관한 정보 보고를 중시하지 않았는지 (의문이다). (그 보고를 중시하고 잘 대응했다면) 미국은 전쟁을 미연에 막거나 전쟁 초기에 피해를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물론 적극 참전한 건 다 인정하고 중시한다. 그건 미국 역사에서도 드문 일이었다. 제1·2차 세계대전 모두 미국은 늦게 참전하지 않았나. 그런데 한국전쟁엔 굉장히 빠른 속도로 참전했다.
또 하나는 전선 교착 문제다. 1951년 5월쯤 되면 중국군이 또 밀리기 시작해 지금의 휴전선 근처에서 전선이 교착됐다. 그러면 빨리 전쟁을 그만두는 게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그 이후 2년이나 더 끈다.
이건 휴전 회담 때문인데, 미국도 1951년 5~6월경엔 이 전쟁에서 승자가 있기 어렵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야코프 말리크 유엔 주재 소련 대표가 휴전 회담을 제안했을 때, 미국이 바로 응한 것도 그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휴전선을 어디에 그을 거냐를 가지고 4개월 정도 설왕설래 끌었고, 그다음에 18개월이라는 긴 기간이 포로 문제로 늘어졌다. (물론) 이렇게 된 데는 공산 쪽 책임도 크다. 이데올로기 전쟁, 이념 전쟁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그리고 국가 위신이 달린 문제이기 때문에도 미국이나 중국이나 시간을 질질 끈 면이 있다.
그런 점도 오늘날 되새겨봐야 한다. 사실 너무나 큰 희생을 치른 것 아닌가. 지금의 휴전선하고 1951년 5~6월 전선하고 거의 똑같다. 그때 전쟁을 그만뒀다면 피해가 많이 줄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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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
공산군 물리친 '국부' 이승만? "잘한 게 없다"
프레시안 : 이승만 정권은 어땠나.
서중석 : 난 이승만 전 대통령이 잘한 것처럼, 한국전쟁에서 뭔가 한 것처럼 (일각에서) 이야기되는 걸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이승만 정권은 (미국보다) 더 문제가 많다. 초기의 패배에 대통령 책임이 너무나 크다. 또 대통령의 도피 같은 것이 장병 사기에 어떤 영향을 줬느냐 하는 걸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이 전 대통령은 1949년 2월경부터 북진 통일을 주장했다. 특히 1949년 9-10월부터는 아주 강하게 주장했다. 그러면 북한이 쳐들어올 것에도 대비하고 국방력을 강화하려는 노력을 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전쟁 전후에 일어난 일을 보면 너무 어이없는 일이 많았다.
대부분의 전사 연구가들은 전쟁이 일어났을 때 북한이 병력면에서 약간 많았던 건 사실이지만 아주 많았던 걸로 보진 않는다. 전투에 투입될 수 있던 인원을 이것저것 다 합쳐도 북한군은 20만 명을 못 넘었다. 남한의 전투 병력을 보면, 육군은 9만 명을 약간 넘었다. 경찰을 비롯한 다른 병력을 다 합쳤을 때 14만∼16만 정도로 잡는다.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교과서가 일부 잘못돼 있고 많은 사람에게 잘못된 관념이 있다는 것이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양쪽 병력은 (그리) 많지 않았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매우 적었다. 이기지 못하면 북한은 쫄딱 망하게 돼 있었다. 희한한 전쟁이었다. 이야기하지 않았나. 톱질처럼 그랬다고. 그렇기 때문에 초기 공격만 잘 막아내면 그다음부터는 북한이 맥을 못 추게 돼 있었다.
북한이 자주포라든가 전차, 야크기를 갖고 있던 건 사실이지만, 그것만으로 그렇게까지 우세할 수 있는가 (하는 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는 산악과 하천이 많기 때문에 시설만 제대로 해놓으면 방어하기가 좋은 면이 있다. 그런데 방어 시설을 잘 갖췄나? 이런 데서도 문제가 있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장병의 3분의 1(2분의 1이라는 기록도 있는데 이건 믿기 어렵다)이 휴가 상태였다고 기록돼 있다. 그 전날 육군회관 낙성식을 해가지고 주요 장교들은 술에 흥청망청 녹초가 된 채 일요일을 맞이한 걸로 돼 있다. 그것 말고도 군 일부에서 '대전차 방어 시설을 해야 한다'고 했는데도, 제대로 안 했다. 전쟁 직전 대통령과 국방부 장관은 북한이 곧 쳐들어올 거란 얘기까지 했다. 그랬는데도, 대비했다고 볼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프레시안 : 이승만 정권이 스스로 공언한 만큼만이라도 대비했으면 전쟁은 매우 다른 모습이었을 것 같다.
서중석 : 그렇다. 대비를 충분히 했다면 전투 양상이 전혀 달랐을 것이다. (개전 직후) 중부 지방으로 북한군 3개 사단이 내려왔는데, 우리 6사단이 상당히 효율적으로 막았다. 오히려 초반전엔 승리했다. 7월 1일 이전까지는 북한이 중부 전선으로 내려오는 걸 저지했다. 그러니 서부 전선에서도 그만한 노력을 했으면 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을 해볼 수 있는 거다. 그런 노력을 했나? 너무나 문제가 많았다고 당시 지휘관은 물론 많은 군사 전문가가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하지 않나.
특히 사단장 교체는 참 이해하기 어렵다.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주요 사단장을 교체했다. 전쟁 초기에 사단장의 힘이라는 건 아주 중요한 거다. 사단이 제대로 살아남느냐, 뿔뿔이 흩어져버리느냐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2사단장이던 이형근(일본군 장교 출신으로 한국군 군번 1번 <편집자>) 스스로 회고록에서 밝혔듯이, (신임 사단장들이) 자기 사단을 장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전쟁을 맞았다.
이런 것들 때문에, 일부 학자는 남한의 최고 요직을 맡고 있던 사람 중에 간첩이 있었던 것 아니냐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이런 이상한 현상이 같은 시기에 일어날 수 있느냐(는 의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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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제헌절에 남산에 있는 자유총연맹 광장(서울시 중구 장충동)에서 이승만 동상 너머로 대형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다. 이승만 동상은 본래 1956년 남산에 세워졌으나, 1960년 4월혁명 때 시민들의 손에 철거됐다. 이승만 전 대통령을 높게 평가하는 자유총연맹은 2011년 남산에 다시 이승만 동상을 세웠다. ⓒ연합뉴스 |
이승만의 사람들…'낙루' 국방부 장관과 '북어 사건' 총참모장
프레시안 : 그런 의문은 여전히 온라인 공간에서 회자되고 있다.
서중석 : 그런 점 못지않게 대통령이 국방부 장관이나 총참모장(지금의 참모총장)에 어떤 사람을 썼는가 하는 것도 중요하다. 사람을 제대로 쓰느냐에 따라 국방 차원에서 대비를 잘했는지가 결정되는 걸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국방부 장관이던 신성모는 군 경력이 전혀 없던 사람이었다. 다만 영국 상선의 선장은 했다. 북진 통일을 한다고 할 때 이 사람은 국회에 나와 '5000톤 배 하나 주면 공산당을 다 치고 바다를 다 치겠다'는 호언장담까지 했다. 또 전쟁이 나면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을 수 있다고 말한 사람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 전 대통령은 그런 흰소리를 하는 사람을 국방부 장관에 앉혔다. 그 전엔 내무부 장관을 맡겼고, 1950년 들어서는 국무총리 서리에 앉혔다. 신성모 같은 사람이 요직을 맡을 수 있었던 건 '낙루(落淚) 장관'이었기 때문이다. 이 전 대통령 노인네가 하문(下問)을 하면, 그 당시엔 하문이라고 했는데, 신성모는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이승만 정권 때는 이런 '낙루 장관', '지당(至當) 장관'이 많았다. 대통령이 방귀를 뀌니까 장관이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라고 아첨했다는 이야기도 있지 않나.
하여튼 이 전 대통령은 군에 대해선 아무런 능력도 없는 '낙루 장관'을 국방부 장관에 2년 넘게 앉혀 놓았다. 전쟁이 일어난 후에도 상당 기간 동안 해임하지 않았다. 1951년 들어 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이하 거창 사건), 국민방위군 사건이 논란이 되면서 이시영 부통령이 사임하고 국회에서도 세게 나오고 그러니까 대통령은 할 수 없이 신성모 장관을 해임했다. 그러고 나서 또 요직인 일본 주재 대사를 시켰다.
총참모장 채병덕도 마찬가지였다. 채병덕은 일본군 장교 출신인데, 일제 때 야전군을 맡아본 적이 없다. 후방 일을 해서 작전 자체를 잘 모르는 사람이다. 채병덕도 신성모 못지않게 이승만 개인에 대한 충성파였다. 국회 프락치 사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하고, 김구 암살 사건에도 연루돼 있다고 많은 사람이 쓰고 있는 인물이다.
채병덕은 1949년에 총참모장이 됐다가 몇 달 후 '북어 사건'으로 해임됐다. 당시 38선에선 남북 간 물물 교환이 많았다. 그걸 장교들이 얻어 쓰기도 하고 군에서 필요한 비용으로도 쓴 모양이다. 그 과정에서 북어 사건이 터졌는데, 사단장이던 김석원이 '채병덕 총참모장이 북한과 물물 거래를 하는 데 관여한 것 아니냐'고 맹렬히 공격하고 대통령에게 항의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대통령은 채병덕과 김석원, 두 사람 다 물러나게 했다. 1949년 10월, 채병덕은 그렇게 해임되고 예편됐다. 그런데 두 달 후, 대통령이 채병덕을 현역으로 복귀시켰다. 하필이면 전쟁 나기 두 달 전인 1950년 4월에는 다시 총참모장을 시켰다. 그러다 전쟁이 터졌는데, 채병덕은 작전을 제대로 펼친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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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몰래 달아나고 또 달아나며 국민에겐 거짓말 방송
프레시안 : 인사가 만사라는 말이 떠오른다.
서중석 : 대통령은 또 어땠나. 전쟁이 났을 때 이 양반은 그야말로 노인네 모습이더라. (물론) 이분도 전쟁(을 이끈) 경험이 있을 수가 없다. 국가의 중요한 장도 1945년 이전엔 맡을 수가 없지 않았나. 행정 경험, 전쟁 경험 같은 게 없거나 아주 약할 수밖에 없는 점은 이해가 간다.
그래도 대통령이란 건 굉장히 소중한 자리다. 바로 비상 국무회의를 소집해서 대책을 세웠어야 하는 거다. 전쟁 수행을 위해 풀어야 할 문제가 굉장히 많고 국민들에게 해야 할 조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6월 25일 일요일 당일엔 국무회의 같지도 않은 국무회의, '간담회'라고도 불리는데 그걸 열었을 뿐이다. 거기서 서로 잡담 비슷한 걸 한 걸로 돼 있지, 대책다운 대책을 논의하거나 세운 게 없다.
대통령은 6대 독자라 그런지 자기 목숨을 굉장히 중시했던 분 같다. 그날(6월 25일) 밤이 되니까 불안해졌는지, 피신하겠다고 했다. 존 무초 초대 주한 미국 대사가 오니까 무초 대사에게 '피신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계속 했다. 내가 얼마나 중요한 자리에 있는지 아느냐, 내가 없으면 이 나라 큰일 난다는 식의 이야기였다. 무초 대사가 오히려 말렸다. '당신이 피신하면 군은 붕괴한다. 모든 방어 능력을 상실한다. 당신이 지켜야 한다. 우리가 당신을 보호해주겠다'고. 그래서 그날은 이 노인네가 안 움직였다.
그다음 날은 월요일이니까 제대로 된 국무회의도 열고 대책을 세웠어야 했다. (전황을 정확히 알리는) 방송이라도 했어야 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1941년) 진주만 기습 사건이 나니까, 미국 사람들을 단결하게 하는 연설을 하지 않았나. 마찬가지로 전쟁이 일어났으면 이 전 대통령도 국가 원수로서 국민한테 '어떻게 대비해야 한다. 정부는 어떻게 해나가겠다' 하는 중요한 연설을 바로 했어야 하는 거다. 그런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신성모 장관과 채병덕 총참모장은 '우리가 이기고 있다'는 헛소리를 했다. 그러자 6월 26일 밤에 열린 심야 국회에서 국회의원들은 수도 사수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같은 시간에 열린 비상 국무회의에서는 수원 천도 결정을 내렸다.
(이런 상황에서) 이 대통령은 6월 27일 새벽 2-3시경 서울역에 비상 열차를 세워놓고 거기 타버렸다. 서울을 떠난다는 이야기를 장관들에게도, 군 수뇌부한테도, 국회에도 일체 안 하고 혼자 가버렸다. 비밀이 새 나갈까 걱정돼서 그랬는진 몰라도, 다른 누구한테도 얘기 안 하고 비서진한테만 얘기해서 그 열차를 끌고 대구까지 내려갔다. 그런데 너무 멀리 왔다고 생각했는지, 이번엔 다시 대전으로 올라갔다.
프레시안 : 이때까지 국민들은 대통령으로부터 어떤 설명도 들을 수 없었다.
서중석 : 그렇다. 대전에서 대통령이 방송국 책임자를 불러 자기 말을 전국 방송으로 내보내게 했다. 거기서 녹음한 거다. 우리가 이기고 있으니 안심하고 있으라는 그 유명한 거짓말 방송을 6월 27일 밤 10시에서 12시 사이에 몇 차례 내보냈다.
하지만 이미 그땐 미아리 근처에서 쿵쾅거리고 있었다. 인민군이 거기까지 내려온 거다. 오죽하면 '이 방송, 이대로 안 된다'고 해서 27일 자정쯤 방송국에서 꺼버렸겠나. 전쟁이 나고 나서 처음으로 나간 대통령의 방송이 그랬다. 대통령이 그렇게 무책임할 수가 없었다.
그 직후인 6월 28일 새벽 2시 30분에 한강 다리가 폭파됐다. 윗선에서 지시한 일이었다. 이것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피란을 못 갔다. (그런데) 대통령은 대전에 가서 비상 국무회의를 주재하다가 7월 1일에 또 피신했다. 대전이 함락되는 건 7월 20일이다. 그러니 적어도 7월 10일 이전에는 그렇게까지 위태롭다고는 볼 수가 없었다. 피신할 준비를 하더라도, 7월 초까지는 대통령이 전체 상황을 파악하면서 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7월 1일 새벽 3시에 이번엔 대구 쪽으로 가면 게릴라 같은 게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지, 호남선을 타고 목포로 갔다. 그러고 나서 목포에서 또 배로 부산까지 갔다. 그런 식으로, 대통령은 전쟁 났을 때 피신만 하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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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들. ⓒ연합뉴스 |
전선에선 피 흘리는데 영구 집권 위해 우격다짐 개헌
프레시안 : 대통령이 그러는 동안 국민들은 커다란 고통을 겪었다.
서중석 : 대통령은 6월 28일에 비상조치령을 내렸다. 긴급 명령 제1호인데, 굉장한 엄벌주의였다. 2심, 3심을 거치지 않고 단심 재판으로 증거 없이 처단하고 중형을 부과할 수 있게끔 했다. 이것 때문에 부역자들이 참 많이 죽었다.
그에 더해 6월말 이후, 대개 7월 초에 국민보도연맹원에 대한 전국적인 학살이 시작돼 8월 중순까지 계속됐다. 또 형무소에서도 대량 학살이 자행됐다. 거창, 산청, 함양, 남원, 영광, 함평 같은 지역에서 11사단을 비롯한 국군에 의한 큰 규모의 학살도 일어난다. 이런 것도 최종 책임은 대통령한테 갈 수 있다. 대통령이 어떻게든지 관민을 화합하게 하지 않고 엄격주의, 처벌주의로 간 것이다. 대규모 학살이 일어날 수 있었던 바탕에는 그런 분위기가 있었다.
프레시안 : 이 시기 국회는 이승만 정권과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서중석 : 국회는 (인권 유린을 막고자) 굉장한 노력을 한다. 사형(私刑)금지법을 통과시키고 대통령의 비상조치에 관한 개정 법률안, 뒤이어 폐지 법률안을 통과시켰다. 그때마다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했다. 그런 식으로 국회랑 사사건건 맞서다가 거창 사건, 국민방위군 사건이 터지는 거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국면이라고 볼 수 있는 1950년 6월 25일부터 거창 사건과 국민방위군 사건을 처리하는 1951년 봄까지, 대통령이 적절하게 전쟁을 수행했나? 그렇지 않다. 말도 안 되는 짓을 했다. 대통령답게 일한 게 과연 얼마나 있나? 그리고 전쟁을 (주도적으로) 수행한 건 누가 봐도 미군, 즉 유엔군 이름으로 싸운 미군이다. 절대적으로 그렇다. 이 전 대통령이 한국전쟁에서 후세에 (좋게) 기억될 만한 것을 한 게 있나? 그런 건 없다.
프레시안 : 그 와중에 이 전 대통령은 우격다짐으로 헌법까지 고쳤다.
서중석 : 이 전 대통령은 권력을 강화하고 영구 집권을 꾀하기 위한 정치 파동만 일으키고 있었다. 거창 사건, 국민방위군 사건에 이어 1951년 하반기에도 국회와 밀고 당기는 일이 계속 일어났다. 그러다가 이 전 대통령은 도저히 국회에서는 대통령으로 재선될 것 같지 않으니까 직선제 헌법 개정안을 내놓는데, 1952년 1월에 참패했다. 가 19, 부 143이라는 상상하기 어려운 표차로 부결됐다.
그러자 이 전 대통령은 땃벌떼, 백골단, 민중자결단 등을 동원하고 관제 민의를 만들어 국회를 협박하고 공갈을 일삼았다. 그 때문에 국회의원들은 이리 도망 다니고 저리 도망 다녀야 했다. 대통령이 그런 난세 중의 난세를 초래한 것이다. 거기다 계엄령 해제를 국회에서 결정하면 대통령은 바로 집행해야 하는데 그걸 안 했다. 그거 헌법 위반이다.
이렇게 부산 정치 파동 과정에서 위헌·위법을 이승만 정부가 너무나 많이 하지 않았나. 그런 속에서 1952년 7월 4일 발췌 개헌을 해가지고 영구 집권을 위한 초석을 닦았다.
그러고 있으면서 과연 전쟁 수행을 제대로 했겠나. 전선에선 사람들이 피 흘리고 있는데 (임시 수도) 부산에선 정부가 이렇게 위헌적인 행위를 장기간에 걸쳐 했다는 건 참 수치스런 일 아니냐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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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 발발 59주년을 이틀 앞둔 2009년 6월 23일 한밤중에, 한 장병이 휴전선에서 가장 넓고 높은 고지인 육군 백두산부대 최전방 초소에서 북녘을 응시하고 있다. ⓒ연합뉴스 |
전략가 이승만? "말도 안 되는 소리"
프레시안 : 두 가지를 추가로 짚었으면 한다. 전쟁이 났을 때 대통령이 영락없는 노인네 모습이었다고 했다. 그와 달리, 이 전 대통령이 몸을 피하면서도 미국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반전의 계기를 만드는 등 냉정한 전략가다운 모습을 보였다는 의견도 있다. 전쟁 직후인 1953년 10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 것도 '전략가 이승만'의 공이라는 의견이다.
서중석 :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런 전략 같은 건 없었다. 당시 한국은 미국이 지켜주던 나라 아닌가. 미국은 자발적으로 앞장섰다. 무초 미국 대사가 바로 본국에 보고했고, 트루먼 대통령은 휴가지에서 회의를 열고 대응책을 논의했다. (미국이) 이 전 대통령 말을 듣고 참전한 게 아니다. 자기들의 세계 전략에 따라 그렇게 한 것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 문제를 보면, 정전협정 체결 후 한국에 아무런 보장도 해주지 않는다는 건 미국으로서도 곤란한 일이었다. 연출이긴 했지만 이승만 전 대통령이 북진 통일을 아주 세게 주장한 것도 조약 체결에 영향을 줬다.
하지만 조약 내용을 들여다보면, 이 전 대통령을 높게 평가하는 쪽이 이야기하는 것과는 다른 면이 있다. 조약엔 북한이 쳐들어오는 걸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뿐만 아니라 (이승만식) 북진 통일을 절대 용납할 수 없다(한국의 행정 관리 아래 있다고 미국이 인정한 영토에 대한 무력 공격에 대해서만 한국에 원조를 제공한다는 것. 달리 말하면 북한이 한국을 공격했을 때는 조약이 적용되지만 반대의 경우엔 해당하지 않는다는 뜻. <편집자>)는 의미도 담겨 있다. 또 전쟁이 나면 미국이 (자동적으로) 즉각 개입하도록 돼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비판도 그간 끊임없이 나왔다. 북한이 침략할 경우 미국이 일정한 절차를 밟아 개입하도록 돼 있다는 말이다.
프레시안 : 두 번째는 북한의 책임 문제다. 진보 학계가 김일성의 책임을 엄중하게 묻기보다는 이승만 정권을 더 강도 높게 비판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도 일부 있다.
서중석 : 그동안 많이 강조한 것처럼, 전쟁을 일으킨 북한의 책임은 너무도 당연하게 물어야 하는 것이다. 김일성이 최대의 잘못을 한 거다. 민주기지론(한반도 전체를 공산화하기 위해 북한 지역을 우선 그 기지로 삼는다는 것. <편집자>)에 따라 (무력으로) 통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아주 치명적인 오판을 한 거다. 국공내전 당시엔 미국이 중국에 군대를 보내지 않았지만, 중국과 한국은 (상황이) 아주 다르지 않았나. 38선은 국제적으로 미국과 소련 세력 사이에서 굉장히 중요한 선이었다. 그걸 넘으면 미국이 개입할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전쟁을 일으킨 건) 김일성의 큰 잘못이었다. 그 때문에 북한도 큰 피해를 봤고 남한에도 극우 반공 체제가 뿌리내리게 된 것 아닌가.
하나 덧붙이면, (해방 후) 북한은 민주기지론, 남한은 단정론으로 가는 이상 전쟁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외세를 등에 업은 전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게끔 되는 것이란 말이다. (전쟁 준비와 관련해 예를 들면) 북한엔 무기, 탄약 같은 것도 빈약했고 사단급 이상의 작전을 펼쳐본 사람이 없었다. 작전 체계를 짜준 게 소련군이었다. 소련과 중국의 지원 없이는 전쟁을 일으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의미에서도, 한국전쟁은 (시작부터) 국제전이 될 수밖에 없었다. 중국의 국공내전이나 미국의 남북전쟁 같은 것들과는 전혀 다른 점이 있었다.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130817173630
프레시안 : 1950년대 하면 암울한 시절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다.
서중석 : 고은 시인이 책 <1950년대>에서 묘사한 것처럼 1950년대는 답답한 시기였다. 연줄, '빽'이 없으면 어디 가서 뭐 하나 제대로 챙겨먹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주먹이 앞서는 불법·탈법·무법의 시대였다. 깡패들의 주먹의 시대, 권력 남용의 시대로 많이 이해된다.
그러나 그것만 있었던 건 아니다. 그 시기에 엄청난 변화가 이뤄졌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새로운 미래를 창출할 수 있는 역량이 쌓였다고 할까, 그런 걸로도 한국전쟁이 가져다준 커다란 변화를 이해할 수 있다.
한국전쟁은 다른 의미에서 사회 혁명이라고 볼 수 있다. 농촌과 산골까지 변화하고 평준화 현상이 확산하며 교육 열풍이 분다. 이와 함께 여성의 사회적 지위도 변화시키는 역할을 한국전쟁이 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혁명적 변화를 가져오지 않았나. 그런 변화가 한국에서도 전쟁을 통해 많이 일어났다. 전쟁이 잘됐다 혹은 그렇지 않다, 그런 걸 떠나서 (전쟁이 가져온) 변화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전쟁이 낳은 커다란 변화
프레시안 : 어떤 변화를 가져왔나.
서중석 : 한국전쟁 때는 물론이고 1950년대엔 군대를 서로 안 가려고 했다. 그래서 손가락을 자르는 경우가 참 많았다. (일례로 1953년 경남 3개 군의 징집 면제자 중 불구자가 80명이었는데, 이 중 오른손 손가락을 작두로 자른 이가 50명에 달했다. <편집자>) 그렇게 자해 행위를 해서 안 가려고도 했고, 징집을 기피해 도망 다니는 젊은이도 많았다. (1961년) 5.16쿠데타 이후 많이 했던 게 군인이 징집 기피자를 잡으러 다니는 거였다.
그렇게 군에 안 가려고 했던 건 군이 무서워서였다. 먹을 것도 제대로 안 주고, 이른바 '빠따' 치고 막 기합을 주지 않았나. 거기다 대통령이 '북진 통일을 한다'고 하는데 그러다 또 전쟁이 일어나면 어떻게 되겠느냐 하는 두려움도 있었다. 한국전쟁을 겪으며 (전쟁에 대한) 두려움이 쌓여 있었던 거다.
이랬던 건데, 당시 촌사람들이 군에 많이 갔다. 이 사람들은 '빽'도 없으니, '군대에 와라' 하면 (자해하지 않는 이상) 어쩔 수 없이 가는 수밖에 없었다. (이와 달리 서울 지역 대학생의 입대 비율은 1950년대 중반 10퍼센트 수준이었다고 한다. <편집자>) 그런데 소위 무지렁이라고 불리던 사람들, 산꼭대기로 조그만 하늘밖에 보이지 않는 산골에 있던 사람들이 (그걸 계기로)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게 된 거다. 물론 (한국전쟁 이전부터) 빨치산이 활동하면서, 산골 주민들 중에는 빨치산과 군경의 싸움 때문에도 변화를 접한 경우도 많다.
하여튼 (시골) 청년들이 군대 갔다 온 것을 계기로 인생이나 세상을 많이 안 것처럼 됐다. 그러면서 이제 시골에선 더 살기 싫다며 도시로 막 빠져나갔다. 또 젊은 여성 중에서 (집안에서) 밥 한 끼라도 줄이려는 생각으로 도시로 나가는 이들이 늘었다. (그 결과) 그야말로 산업화 없는 도시화가 이뤄졌다. 도시는 점점 인구 과잉이 됐다. 그러면서 판자촌이니 달동네가 엄청나게 많이 생겼다. 그렇지만 이런 것들이 대단한 활력소였다. 이 문제는 평준화 현상의 확산과도 관련돼 있다.
프레시안 :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고 있었나.
서중석 : 일제 때 한국인들은 권력을 일본인들에게 다 뺏겼다. 제국주의자들이 현지 주민들의 전통적인 여러 면을 놓아두면서 주로 간접 통치를 한 인도, 인도네시아, 인도차이나 지역과는 다른 점이다. 일본은 면 단위까지 (직접) 장악해 통치하고, 권력과 주요 재산을 빼앗았다. (다수의) 한국인들은 그만큼 하등으로 몰리면서 하향 평준화가 됐다.
일제를 거치면서 지주들은 어느 정도 남아 있었지만 양반은 거의 다 망했다. 거기다 해방 후 혁명적 분위기 때문에, 그나마 남아 있던 지주들도 많이 몰락했다. 한때는 (많은) 지방 유지도 힘을 잃었다. 유지 중에 노골적으로 친일 행위를 한 사람이 적지 않았고, 그 때문에 해방 후 동네에서 적극적으로 발언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그러면서 혁명적 분위기가 더 강해진 거다. 그러고는 농지 개혁이 시작되고 곧이어 전쟁이 이어지면서 농촌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한국 사회는 어떤 면에서는 공산주의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굉장히 평등화가 됐다.
한국처럼 양반, 상놈, 노비 따지는 나라를 찾기 어려웠는데, 일제를 겪고 해방 직후(의 혁명적 분위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이게 싹 없어지다시피 했다. '노력만 하면 된다. 배우면 된다. 다 출세할 수 있다'는 분위기가 사회 전반에 가득하게 된 거다. 잘 배우면 된다는 건 이른바 일류 학교에 들어가는 걸 의미했다. 한국은 '빽' 사회, 연줄 사회니 일류 학교에 가면 연줄도 많이 생기고 그런 면에서도 잘될 거라고 본 것이다.
프레시안 : 1950년대 교육열, 어느 정도였나.
서중석 : 그전에도 교육열이 높았던 사회이긴 했지만, 전쟁 후 평준화 현상과 겹치면서 엄청난 교육 팽창이 일어났다. 그러면서 대학만 일류, 이류, 삼류가 있는 게 아니라 고등학교, 중학교, 나아가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마저 그렇게 나뉘었다.
1950~1960년대엔 한 학급에 100명이 넘는 곳이 많았다. 130명인 곳도 있었다. 그러면서 이부제, 삼부제 수업을 받는 데가 무척 많았다. 1일 3교대로 가르치는 게 삼부제다. 그런 데가 많았다.
이건 뭘 의미하는 거냐 하면, 한국 사회에 대량으로 한글세대가 탄생했다는 거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취직할 데는 별로 없었다. 산업예비군으로 축적됐다. 쌓이고 쌓인 이 산업예비군은 어디서 무슨 일만 준다면 열심히, 그야말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할 사람들이었다. 이 사람들이 1960~1980년대 30년간 산업화의 그야말로 역군이 된 것이다.
한국전쟁의 의도하지 않은 효과, 경제 발전의 밑거름 마련
프레시안 : 전쟁을 일으킨 사람들이 의도한 건 전혀 아니지만, 전쟁을 통해 평준화가 더 확산되고 그게 교육 열풍 등과 맞물리면서 1960년대 이후 경제 발전의 밑거름 역할을 하게 됐다는 말로 들린다.
서중석 : 그렇다. 경제 발전을 위한 여러 요소가 1950년대 말경부터 쌓여갔다. 특히 한글을 읽을 수 있고 어느 공장에서건 한글로 쓰인 기본적인 수칙을 다 지킬 수 있는 근면한 한글세대가 한국전쟁을 거치며 대규모로 쌓였다(는 게 중요하다). 이것이 (사회에) 역동적인 활기를 불어넣었고 경제 발전을 이루는 데 큰 힘으로 작용했다. 그러면서 1960년대 중후반부터는 한일협정 자금, 베트남 특수, 각종 차관 등의 형태로 외국 자본도 많이 들어오게 된다.
이런 것들을 어떤 식으로 결합해 나가느냐 하는 게 매우 중요한 상황이었다. (이 대목에서) 뭐든 열심히 해보려 했던 (우수한) 산업예비군(의 존재) 못지않게 국가 권력의 특성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시기 국가 권력은 어떤 면에서는 일제가 행사한 권력보다 더 강화된 측면이 있다. 부정부패하고 친일파도 많았던 이승만 정부는 무능하기 짝이 없는 나쁜 정부로 보이는 면이 분명히 있었다. 그런데도 전쟁 후 이승만 정부는 굉장히 힘이 셌다.
프레시안 : 그 이유는 무엇인가.
서중석 :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지주 계급은 힘을 잃었고, 지가증권(농지 개혁 과정에서 정부가 지주에게 농지 대금으로 준 증권. <편집자>)은 똥값이 됐다. 대지주는 은행 융자를 받거나 귀속 재산을 불하받는 데 지가증권을 쓰면서 그나마 많이 살아났지만, 중소지주는 사실상 쫄딱 망했다.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 한국에서 큰 재산, (그러니까) 큰 기업을 일구는 데 쓸 수 있는 건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일제의 귀속 재산이었다. 큰 기업이나 공장은 대부분 일제가 남긴 것이었는데, 이걸 어떻게 불하받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였다. 그런데 그건 정치 권력과 특별한 관계를 맺지 않으면 안 되는 거였다. 그러니 정치 권력이 아주 힘이 셀 수밖에 없었다.
그거 못지않게 경제를 좌지우지했던 게 미국의 원조 물자를 어떻게 배정받느냐 하는 것이었다. 원조 물자를 잘 배정받으면 경제력을 크게 키울 수 있었다. 원조는 재벌을 탄생시킨 주역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재벌이라든가 경제인은 한편으로는 자유당 간부 못지않게 굉장히 큰 부자이고 특권층임은 분명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권력 앞에서 힘을 못 쓰는 존재였다. 경제가 국가 권력에 예속된 형태가 될 수밖에 없었고, 전쟁 이후에 이런 현상이 더 강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면에선 국가 권력이 일제 때보다도 더 셌고, 그런 면을 (훗날) 박정희 정부가 더 강화했다고 볼 수 있다.
문화계에서도 국가 권력은 그야말로 무소불위였다. 진보적인 문화 활동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굉장히 위축당했다. 저항적 문인들이 (일부) 활약하긴 했지만, 대개는 관과 결탁한 문인들이 힘을 발휘했다. 문화계라든가 교육계를 좌지우지한 건 친일파거나 관 결탁 세력이었다.
이렇게 막강한 국가 권력이 구축됐다. 그런 속에서 주로 미국으로 유학이나 연수를 가서 상당한 실력을 쌓았다는 사람들이 1950년대 중후반 이후 계속 들어왔다. 새로운 테크노크라트가 국가 권력을 조정하고 이끌어가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하게 되는 거다.
학살로 세운 극우 반공 체제
프레시안 : 전쟁을 거치면서 이승만 정부의 힘이 강해졌다는 점을 이야기했다. 이는 극우 반공 체제 강화 문제로 바로 이어진다.
서중석 : 한국전쟁으로 한국 사회가 많은 어려움을 안게 됐다. 특히 사회를 극도로 단순화한 극우 반공 체제가 한국전쟁을 계기로 내면화됐다.
물론 전쟁이 나기 전에도 이승만 정부는 반공을 역설했다. 빨갱이를 엄벌에 처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 결과 감옥소가 그야말로 '좌익수'로 넘쳐났다. 감옥에 갇힌 죄수의 80퍼센트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잡힌 좌익수라는 보고가 있을 정도였다. 거기다 이 사람들을 조그만 감방에 잔뜩 집어넣어가지고 말할 수 없는 고생을 시켰다. (1948년 12월 국가보안법이 탄생했다. 그 이듬해인 1949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검거·투옥된 사람이 무려 11만8621명에 달했다. 이 때문에 교도소가 꽉 차, 1949년 10월 형무소 두 곳을 새로 만든다는 결정이 내려질 정도였다. 그러나 이 '좌익수'의 상당수는 이른바 빨갱이와는 거리가 멀었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편집자>) 또 제주 4.3사건, 여순사건 등을 거치며 일부 지역에서는 이미 많은 사람이 (반공주의로 인해) 피해를 보고 있었다.
그럼에도 전쟁 전까지는 반공주의가 그렇게 먹혀들지 못했다. 이 점은 1950년 5.30 선거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이승만 세력은 참패하고 이승만에게 비판적인)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이 대거 당선됐다. (전체 210석 중) 무소속 국회의원이 126명이나 탄생했는데, 이 중엔 합리적인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있었다. 2대 국회는 민권을 위한 국회라는 말까지 들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승만 정권이 그렇게 강권으로 주입하려도 해도 잘되지 않던 극우 반공주의가 전쟁을 거치면서 위세를 떨치게 됐다. 왜 그렇게 됐나? 제일 큰 이유는 전국적으로 일어난 집단 학살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 공포란 건 이루 말할 수가 없다. (학살은) 어느 지역에서나 일어났다. 그런 식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가면서 정부 비판, 이승만 반대 같은 건 절대적으로 피해야 하는 게 돼버렸다. 선거 때도 조심해야 했다.
부역자로 몰린 사람도 굉장히 많았다. 그렇게 부역자로 몰려 죽은 사람도 그렇고 감옥소에서 고생하는 사람들과 그 가족들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게 된 거다. 연좌제도 심하지 않았나. (이런 상황에선) 이승만 권력이 요구하는 대로 묵묵히 따를 수밖에 없다는 현실 순응주의가 공포감과 결합하면서 강력한 극우 반공 체제가 만들어진 거다.
프레시안 : 학살 등을 통해 강력하게 기틀을 마련한 극우 반공 체제는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후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서중석 : 그렇다. 독재 정권들은 반공 이데올로기와 함께 분단을 최대한 활용해 독재를 강화하고, 그것을 수호하는 활동을 해왔다. 그런 것들도 따지고 보면 다 한국전쟁으로 귀착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도) 한국전쟁 시기에 수많은 살상과 집단 학살, 동족상잔 같은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있었다는 걸 잊지 말고, 다시는 그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게 해야 한다.
한국의 전 역사를 돌아봐도 (한국전쟁 때 같은) 그만한 규모의 학살과 동족상잔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런데 일제의 압제에서 해방돼 새로운 사회로 발전시키자고 하는 길목에서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것이 한국을 극우 반공주의로 가게끔 만들었다. 그렇기 때문에도 이런 전쟁은 (다시는)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된다.
한국 문제는 전쟁을 통해서는 절대 해결되지 않는다
프레시안 : 한국전쟁은 내전의 성격만이 아니라 국제전의 성격도 강하게 지니고 있다. 한국만이 아니라 주변국들에도 한국전쟁은 대사건이었다.
서중석 : 한국전쟁은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 중국, 러시아, 북한에도 똑같이 큰 교훈을 줬다. 그리고 귀일하는 지점이 있다. 뭐냐 하면, 한국 문제는 전쟁을 통해서는 절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전쟁 같은 전쟁이 한반도에서 다시는 일어나선 안 된다는 것이다. 미국은 미국대로 뼈저리게 느꼈고, 중국은 중국대로 얼마나 큰 희생을 치렀나. 승리했다고 주장은 하지만 굉장히 큰 희생을 치렀다. 러시아(한국전쟁 당시 소련)도 자기들이 일단 뒤에 물러서 있긴 했다고 하더라도 이 전쟁(의 내막)을 잘 알고 있다. 자신들이 관계돼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고.
난 주변국들이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길 절대로 바라지 않는다고 본다. (한국전쟁 경험을 통해) 한반도에서 전쟁이 다시는 일어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걸 강대국들이 공통적으로 느끼기 때문이기도 하고, 전쟁이 일어나 북한이 파멸할 경우 보트 피플을 비롯한 엄청난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북한의 경우, 한국전쟁이 일어난 직후 제공권과 제해권을 미국에 완전히 뺏겼다. 1950년 7월 초순에 이미 넘어갔다. 7월 중순이 되면 북쪽의 해군력과 공군력이 힘을 못 쓴다. 미국이 일방적으로 북한 상공을 장악하는 걸 볼 수 있다. 특히 휴전 회담이 진행되던 2년 동안 북한에 엄청난 폭탄이 쏟아졌다.
얼마 전 출간된 책 <폭격 : 미 공군의 공중 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에 이 내용이 잘 정리돼 있다. 당시 출격했던 미국 공군의 기록을 분석한 이 책에는 미국 공군이 북한의 여러 도시를 폭격하기 이전과 이후를 비교하는 내용이 실려 있다. 폭격 후 그 도시들은 완전히 잿더미가 됐다. (이런 걸 보면) 북한이 (미군의 폭격으로) 얼마나 철저하게 파괴됐는지, 그 때문에 북한이 얼마나 전쟁을 무서워하게 됐는지를 알 수 있다.
물론 북한은 한국전쟁 이후에도 (한반도를) 사회주의로 통일시키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하고 전쟁(을 일으키는 것)하고는 별개의 문제라고 본다. 물론 (한국전쟁 이후) 북한이 국지전을 생각해본 적은 있다. 예컨대 1960년대 후반에 그러지 않았나. 그러나 전면전 문제는 다르다. 난 한국전쟁의 공포가, 북한이 전면전으로 들어가는 것을 계속 막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한국전쟁 당시) 북한의 피해가 컸다.
한국전쟁을 깊이 이해할수록 한국 사회가 잘 보인다
프레시안 : 정전협정이 체결된 지 60년이 지났다. 그렇지만 한반도는 여전히 긴장 상태다.
서중석 : 한국전쟁의 큰 교훈은, 한편으로는 학살이라든가 부역자 문제 등을 오늘의 시점에서 다시 새겨보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다시는 그런 전쟁이 일어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전쟁만은 막아야 한다. 한반도 평화처럼 소중한 건 없다. 그게 한국전쟁의 최대 교훈이다.
그런데도 '확 싸지르자', 말하자면 '까불면 응징해야 한다'는 식으로 긴장을 고조시키고 '전쟁도 좋다'는 극단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지금 남한과 북한에 있다. 그건 굉장히 위험하다. 남한이나 북한이나 무서운 파괴 수단을 가지고 있는데, 이런 전쟁광적인 사람들에 의해 순간적으로 잘못 처리되면 어떻게 되겠나.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평화의 기틀을 탄탄하게 만들기 위한 노력을 지금까지도 많이 했지만, 앞으로도 굉장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프레시안 : 올해 들어서도 남북 관계는 격랑에 부닥쳤다.
서중석 : 지난봄에도 큰일 날 것처럼 느낄 수밖에 없는 분위기가 한때 있지 않았나. 남쪽이나 북쪽이나 무섭게 나왔다. 그러면서 정말 최악의 상태까지 가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을 많은 사람에게 줬다. 그런 걸 생각하더라도, 긴장을 완화하고 평화를 정착시키며 구조적으로 자리 잡게 하기 위해 지혜를 다각도로 짜내고 활동으로 옮겨야 한다.
그와 동시에 한국전쟁이 가져다준 사회적인 큰 변화를 역동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현대사를 이해하는 데 아주 소중하다. 경제 발전을 어느 한 사람과 연결해 생각하는 건 굉장히 단순한 사고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누구나 얘기하면서 우리 경우에 대해선 그렇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 참 많다. (그런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도) 한국전쟁이 문화, 경제, 사고, 습관, 생활 등 여러 면에서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폭넓게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그것은 우리 사회에 대한 자신이라고 할까 깊은 믿음을 갖게 하고, 평화를 구축하고 우리 사회를 민주주의와 인권으로 나아가게 하는 데 큰 힘이 될 것이다.
한국전쟁을 깊이 이해할수록 현재 한국 사회를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건 우리 사회가 어떤 사회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나침반과 같은 역할을 해줄 수 있다.
서중석 : 고은 시인이 책 <1950년대>에서 묘사한 것처럼 1950년대는 답답한 시기였다. 연줄, '빽'이 없으면 어디 가서 뭐 하나 제대로 챙겨먹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주먹이 앞서는 불법·탈법·무법의 시대였다. 깡패들의 주먹의 시대, 권력 남용의 시대로 많이 이해된다.
그러나 그것만 있었던 건 아니다. 그 시기에 엄청난 변화가 이뤄졌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새로운 미래를 창출할 수 있는 역량이 쌓였다고 할까, 그런 걸로도 한국전쟁이 가져다준 커다란 변화를 이해할 수 있다.
한국전쟁은 다른 의미에서 사회 혁명이라고 볼 수 있다. 농촌과 산골까지 변화하고 평준화 현상이 확산하며 교육 열풍이 분다. 이와 함께 여성의 사회적 지위도 변화시키는 역할을 한국전쟁이 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혁명적 변화를 가져오지 않았나. 그런 변화가 한국에서도 전쟁을 통해 많이 일어났다. 전쟁이 잘됐다 혹은 그렇지 않다, 그런 걸 떠나서 (전쟁이 가져온) 변화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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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
한국전쟁이 낳은 커다란 변화
프레시안 : 어떤 변화를 가져왔나.
서중석 : 한국전쟁 때는 물론이고 1950년대엔 군대를 서로 안 가려고 했다. 그래서 손가락을 자르는 경우가 참 많았다. (일례로 1953년 경남 3개 군의 징집 면제자 중 불구자가 80명이었는데, 이 중 오른손 손가락을 작두로 자른 이가 50명에 달했다. <편집자>) 그렇게 자해 행위를 해서 안 가려고도 했고, 징집을 기피해 도망 다니는 젊은이도 많았다. (1961년) 5.16쿠데타 이후 많이 했던 게 군인이 징집 기피자를 잡으러 다니는 거였다.
그렇게 군에 안 가려고 했던 건 군이 무서워서였다. 먹을 것도 제대로 안 주고, 이른바 '빠따' 치고 막 기합을 주지 않았나. 거기다 대통령이 '북진 통일을 한다'고 하는데 그러다 또 전쟁이 일어나면 어떻게 되겠느냐 하는 두려움도 있었다. 한국전쟁을 겪으며 (전쟁에 대한) 두려움이 쌓여 있었던 거다.
이랬던 건데, 당시 촌사람들이 군에 많이 갔다. 이 사람들은 '빽'도 없으니, '군대에 와라' 하면 (자해하지 않는 이상) 어쩔 수 없이 가는 수밖에 없었다. (이와 달리 서울 지역 대학생의 입대 비율은 1950년대 중반 10퍼센트 수준이었다고 한다. <편집자>) 그런데 소위 무지렁이라고 불리던 사람들, 산꼭대기로 조그만 하늘밖에 보이지 않는 산골에 있던 사람들이 (그걸 계기로)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게 된 거다. 물론 (한국전쟁 이전부터) 빨치산이 활동하면서, 산골 주민들 중에는 빨치산과 군경의 싸움 때문에도 변화를 접한 경우도 많다.
하여튼 (시골) 청년들이 군대 갔다 온 것을 계기로 인생이나 세상을 많이 안 것처럼 됐다. 그러면서 이제 시골에선 더 살기 싫다며 도시로 막 빠져나갔다. 또 젊은 여성 중에서 (집안에서) 밥 한 끼라도 줄이려는 생각으로 도시로 나가는 이들이 늘었다. (그 결과) 그야말로 산업화 없는 도시화가 이뤄졌다. 도시는 점점 인구 과잉이 됐다. 그러면서 판자촌이니 달동네가 엄청나게 많이 생겼다. 그렇지만 이런 것들이 대단한 활력소였다. 이 문제는 평준화 현상의 확산과도 관련돼 있다.
프레시안 :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고 있었나.
서중석 : 일제 때 한국인들은 권력을 일본인들에게 다 뺏겼다. 제국주의자들이 현지 주민들의 전통적인 여러 면을 놓아두면서 주로 간접 통치를 한 인도, 인도네시아, 인도차이나 지역과는 다른 점이다. 일본은 면 단위까지 (직접) 장악해 통치하고, 권력과 주요 재산을 빼앗았다. (다수의) 한국인들은 그만큼 하등으로 몰리면서 하향 평준화가 됐다.
일제를 거치면서 지주들은 어느 정도 남아 있었지만 양반은 거의 다 망했다. 거기다 해방 후 혁명적 분위기 때문에, 그나마 남아 있던 지주들도 많이 몰락했다. 한때는 (많은) 지방 유지도 힘을 잃었다. 유지 중에 노골적으로 친일 행위를 한 사람이 적지 않았고, 그 때문에 해방 후 동네에서 적극적으로 발언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그러면서 혁명적 분위기가 더 강해진 거다. 그러고는 농지 개혁이 시작되고 곧이어 전쟁이 이어지면서 농촌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한국 사회는 어떤 면에서는 공산주의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굉장히 평등화가 됐다.
한국처럼 양반, 상놈, 노비 따지는 나라를 찾기 어려웠는데, 일제를 겪고 해방 직후(의 혁명적 분위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이게 싹 없어지다시피 했다. '노력만 하면 된다. 배우면 된다. 다 출세할 수 있다'는 분위기가 사회 전반에 가득하게 된 거다. 잘 배우면 된다는 건 이른바 일류 학교에 들어가는 걸 의미했다. 한국은 '빽' 사회, 연줄 사회니 일류 학교에 가면 연줄도 많이 생기고 그런 면에서도 잘될 거라고 본 것이다.
프레시안 : 1950년대 교육열, 어느 정도였나.
서중석 : 그전에도 교육열이 높았던 사회이긴 했지만, 전쟁 후 평준화 현상과 겹치면서 엄청난 교육 팽창이 일어났다. 그러면서 대학만 일류, 이류, 삼류가 있는 게 아니라 고등학교, 중학교, 나아가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마저 그렇게 나뉘었다.
1950~1960년대엔 한 학급에 100명이 넘는 곳이 많았다. 130명인 곳도 있었다. 그러면서 이부제, 삼부제 수업을 받는 데가 무척 많았다. 1일 3교대로 가르치는 게 삼부제다. 그런 데가 많았다.
이건 뭘 의미하는 거냐 하면, 한국 사회에 대량으로 한글세대가 탄생했다는 거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취직할 데는 별로 없었다. 산업예비군으로 축적됐다. 쌓이고 쌓인 이 산업예비군은 어디서 무슨 일만 준다면 열심히, 그야말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할 사람들이었다. 이 사람들이 1960~1980년대 30년간 산업화의 그야말로 역군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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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 1일, 서울지방병무청에서 진행된 올해 첫 징병 검사에서 현역 판정을 받은 검사 대상자가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고 있다. 이런 모습과 달리, 1950년대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징집은 커다란 부담이었다. 그 부담 때문에 자신의 손가락을 자르는 일도 적지 않았다. ⓒ연합뉴스 |
한국전쟁의 의도하지 않은 효과, 경제 발전의 밑거름 마련
프레시안 : 전쟁을 일으킨 사람들이 의도한 건 전혀 아니지만, 전쟁을 통해 평준화가 더 확산되고 그게 교육 열풍 등과 맞물리면서 1960년대 이후 경제 발전의 밑거름 역할을 하게 됐다는 말로 들린다.
서중석 : 그렇다. 경제 발전을 위한 여러 요소가 1950년대 말경부터 쌓여갔다. 특히 한글을 읽을 수 있고 어느 공장에서건 한글로 쓰인 기본적인 수칙을 다 지킬 수 있는 근면한 한글세대가 한국전쟁을 거치며 대규모로 쌓였다(는 게 중요하다). 이것이 (사회에) 역동적인 활기를 불어넣었고 경제 발전을 이루는 데 큰 힘으로 작용했다. 그러면서 1960년대 중후반부터는 한일협정 자금, 베트남 특수, 각종 차관 등의 형태로 외국 자본도 많이 들어오게 된다.
이런 것들을 어떤 식으로 결합해 나가느냐 하는 게 매우 중요한 상황이었다. (이 대목에서) 뭐든 열심히 해보려 했던 (우수한) 산업예비군(의 존재) 못지않게 국가 권력의 특성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시기 국가 권력은 어떤 면에서는 일제가 행사한 권력보다 더 강화된 측면이 있다. 부정부패하고 친일파도 많았던 이승만 정부는 무능하기 짝이 없는 나쁜 정부로 보이는 면이 분명히 있었다. 그런데도 전쟁 후 이승만 정부는 굉장히 힘이 셌다.
프레시안 : 그 이유는 무엇인가.
서중석 :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지주 계급은 힘을 잃었고, 지가증권(농지 개혁 과정에서 정부가 지주에게 농지 대금으로 준 증권. <편집자>)은 똥값이 됐다. 대지주는 은행 융자를 받거나 귀속 재산을 불하받는 데 지가증권을 쓰면서 그나마 많이 살아났지만, 중소지주는 사실상 쫄딱 망했다.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 한국에서 큰 재산, (그러니까) 큰 기업을 일구는 데 쓸 수 있는 건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일제의 귀속 재산이었다. 큰 기업이나 공장은 대부분 일제가 남긴 것이었는데, 이걸 어떻게 불하받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였다. 그런데 그건 정치 권력과 특별한 관계를 맺지 않으면 안 되는 거였다. 그러니 정치 권력이 아주 힘이 셀 수밖에 없었다.
그거 못지않게 경제를 좌지우지했던 게 미국의 원조 물자를 어떻게 배정받느냐 하는 것이었다. 원조 물자를 잘 배정받으면 경제력을 크게 키울 수 있었다. 원조는 재벌을 탄생시킨 주역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재벌이라든가 경제인은 한편으로는 자유당 간부 못지않게 굉장히 큰 부자이고 특권층임은 분명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권력 앞에서 힘을 못 쓰는 존재였다. 경제가 국가 권력에 예속된 형태가 될 수밖에 없었고, 전쟁 이후에 이런 현상이 더 강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면에선 국가 권력이 일제 때보다도 더 셌고, 그런 면을 (훗날) 박정희 정부가 더 강화했다고 볼 수 있다.
문화계에서도 국가 권력은 그야말로 무소불위였다. 진보적인 문화 활동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굉장히 위축당했다. 저항적 문인들이 (일부) 활약하긴 했지만, 대개는 관과 결탁한 문인들이 힘을 발휘했다. 문화계라든가 교육계를 좌지우지한 건 친일파거나 관 결탁 세력이었다.
이렇게 막강한 국가 권력이 구축됐다. 그런 속에서 주로 미국으로 유학이나 연수를 가서 상당한 실력을 쌓았다는 사람들이 1950년대 중후반 이후 계속 들어왔다. 새로운 테크노크라트가 국가 권력을 조정하고 이끌어가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하게 되는 거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
학살로 세운 극우 반공 체제
프레시안 : 전쟁을 거치면서 이승만 정부의 힘이 강해졌다는 점을 이야기했다. 이는 극우 반공 체제 강화 문제로 바로 이어진다.
서중석 : 한국전쟁으로 한국 사회가 많은 어려움을 안게 됐다. 특히 사회를 극도로 단순화한 극우 반공 체제가 한국전쟁을 계기로 내면화됐다.
물론 전쟁이 나기 전에도 이승만 정부는 반공을 역설했다. 빨갱이를 엄벌에 처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 결과 감옥소가 그야말로 '좌익수'로 넘쳐났다. 감옥에 갇힌 죄수의 80퍼센트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잡힌 좌익수라는 보고가 있을 정도였다. 거기다 이 사람들을 조그만 감방에 잔뜩 집어넣어가지고 말할 수 없는 고생을 시켰다. (1948년 12월 국가보안법이 탄생했다. 그 이듬해인 1949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검거·투옥된 사람이 무려 11만8621명에 달했다. 이 때문에 교도소가 꽉 차, 1949년 10월 형무소 두 곳을 새로 만든다는 결정이 내려질 정도였다. 그러나 이 '좌익수'의 상당수는 이른바 빨갱이와는 거리가 멀었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편집자>) 또 제주 4.3사건, 여순사건 등을 거치며 일부 지역에서는 이미 많은 사람이 (반공주의로 인해) 피해를 보고 있었다.
그럼에도 전쟁 전까지는 반공주의가 그렇게 먹혀들지 못했다. 이 점은 1950년 5.30 선거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이승만 세력은 참패하고 이승만에게 비판적인)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이 대거 당선됐다. (전체 210석 중) 무소속 국회의원이 126명이나 탄생했는데, 이 중엔 합리적인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있었다. 2대 국회는 민권을 위한 국회라는 말까지 들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승만 정권이 그렇게 강권으로 주입하려도 해도 잘되지 않던 극우 반공주의가 전쟁을 거치면서 위세를 떨치게 됐다. 왜 그렇게 됐나? 제일 큰 이유는 전국적으로 일어난 집단 학살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 공포란 건 이루 말할 수가 없다. (학살은) 어느 지역에서나 일어났다. 그런 식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가면서 정부 비판, 이승만 반대 같은 건 절대적으로 피해야 하는 게 돼버렸다. 선거 때도 조심해야 했다.
부역자로 몰린 사람도 굉장히 많았다. 그렇게 부역자로 몰려 죽은 사람도 그렇고 감옥소에서 고생하는 사람들과 그 가족들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게 된 거다. 연좌제도 심하지 않았나. (이런 상황에선) 이승만 권력이 요구하는 대로 묵묵히 따를 수밖에 없다는 현실 순응주의가 공포감과 결합하면서 강력한 극우 반공 체제가 만들어진 거다.
프레시안 : 학살 등을 통해 강력하게 기틀을 마련한 극우 반공 체제는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후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서중석 : 그렇다. 독재 정권들은 반공 이데올로기와 함께 분단을 최대한 활용해 독재를 강화하고, 그것을 수호하는 활동을 해왔다. 그런 것들도 따지고 보면 다 한국전쟁으로 귀착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도) 한국전쟁 시기에 수많은 살상과 집단 학살, 동족상잔 같은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있었다는 걸 잊지 말고, 다시는 그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게 해야 한다.
한국의 전 역사를 돌아봐도 (한국전쟁 때 같은) 그만한 규모의 학살과 동족상잔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런데 일제의 압제에서 해방돼 새로운 사회로 발전시키자고 하는 길목에서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것이 한국을 극우 반공주의로 가게끔 만들었다. 그렇기 때문에도 이런 전쟁은 (다시는)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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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 전 대통령. ⓒ연합뉴스 |
한국 문제는 전쟁을 통해서는 절대 해결되지 않는다
프레시안 : 한국전쟁은 내전의 성격만이 아니라 국제전의 성격도 강하게 지니고 있다. 한국만이 아니라 주변국들에도 한국전쟁은 대사건이었다.
서중석 : 한국전쟁은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 중국, 러시아, 북한에도 똑같이 큰 교훈을 줬다. 그리고 귀일하는 지점이 있다. 뭐냐 하면, 한국 문제는 전쟁을 통해서는 절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전쟁 같은 전쟁이 한반도에서 다시는 일어나선 안 된다는 것이다. 미국은 미국대로 뼈저리게 느꼈고, 중국은 중국대로 얼마나 큰 희생을 치렀나. 승리했다고 주장은 하지만 굉장히 큰 희생을 치렀다. 러시아(한국전쟁 당시 소련)도 자기들이 일단 뒤에 물러서 있긴 했다고 하더라도 이 전쟁(의 내막)을 잘 알고 있다. 자신들이 관계돼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고.
난 주변국들이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길 절대로 바라지 않는다고 본다. (한국전쟁 경험을 통해) 한반도에서 전쟁이 다시는 일어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걸 강대국들이 공통적으로 느끼기 때문이기도 하고, 전쟁이 일어나 북한이 파멸할 경우 보트 피플을 비롯한 엄청난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북한의 경우, 한국전쟁이 일어난 직후 제공권과 제해권을 미국에 완전히 뺏겼다. 1950년 7월 초순에 이미 넘어갔다. 7월 중순이 되면 북쪽의 해군력과 공군력이 힘을 못 쓴다. 미국이 일방적으로 북한 상공을 장악하는 걸 볼 수 있다. 특히 휴전 회담이 진행되던 2년 동안 북한에 엄청난 폭탄이 쏟아졌다.
얼마 전 출간된 책 <폭격 : 미 공군의 공중 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에 이 내용이 잘 정리돼 있다. 당시 출격했던 미국 공군의 기록을 분석한 이 책에는 미국 공군이 북한의 여러 도시를 폭격하기 이전과 이후를 비교하는 내용이 실려 있다. 폭격 후 그 도시들은 완전히 잿더미가 됐다. (이런 걸 보면) 북한이 (미군의 폭격으로) 얼마나 철저하게 파괴됐는지, 그 때문에 북한이 얼마나 전쟁을 무서워하게 됐는지를 알 수 있다.
물론 북한은 한국전쟁 이후에도 (한반도를) 사회주의로 통일시키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하고 전쟁(을 일으키는 것)하고는 별개의 문제라고 본다. 물론 (한국전쟁 이후) 북한이 국지전을 생각해본 적은 있다. 예컨대 1960년대 후반에 그러지 않았나. 그러나 전면전 문제는 다르다. 난 한국전쟁의 공포가, 북한이 전면전으로 들어가는 것을 계속 막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한국전쟁 당시) 북한의 피해가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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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 당시 폭탄을 투하하는 유엔군 폭격기들. ⓒ연합뉴스 |
한국전쟁을 깊이 이해할수록 한국 사회가 잘 보인다
프레시안 : 정전협정이 체결된 지 60년이 지났다. 그렇지만 한반도는 여전히 긴장 상태다.
서중석 : 한국전쟁의 큰 교훈은, 한편으로는 학살이라든가 부역자 문제 등을 오늘의 시점에서 다시 새겨보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다시는 그런 전쟁이 일어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전쟁만은 막아야 한다. 한반도 평화처럼 소중한 건 없다. 그게 한국전쟁의 최대 교훈이다.
그런데도 '확 싸지르자', 말하자면 '까불면 응징해야 한다'는 식으로 긴장을 고조시키고 '전쟁도 좋다'는 극단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지금 남한과 북한에 있다. 그건 굉장히 위험하다. 남한이나 북한이나 무서운 파괴 수단을 가지고 있는데, 이런 전쟁광적인 사람들에 의해 순간적으로 잘못 처리되면 어떻게 되겠나.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평화의 기틀을 탄탄하게 만들기 위한 노력을 지금까지도 많이 했지만, 앞으로도 굉장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프레시안 : 올해 들어서도 남북 관계는 격랑에 부닥쳤다.
서중석 : 지난봄에도 큰일 날 것처럼 느낄 수밖에 없는 분위기가 한때 있지 않았나. 남쪽이나 북쪽이나 무섭게 나왔다. 그러면서 정말 최악의 상태까지 가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을 많은 사람에게 줬다. 그런 걸 생각하더라도, 긴장을 완화하고 평화를 정착시키며 구조적으로 자리 잡게 하기 위해 지혜를 다각도로 짜내고 활동으로 옮겨야 한다.
그와 동시에 한국전쟁이 가져다준 사회적인 큰 변화를 역동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현대사를 이해하는 데 아주 소중하다. 경제 발전을 어느 한 사람과 연결해 생각하는 건 굉장히 단순한 사고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누구나 얘기하면서 우리 경우에 대해선 그렇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 참 많다. (그런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도) 한국전쟁이 문화, 경제, 사고, 습관, 생활 등 여러 면에서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폭넓게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그것은 우리 사회에 대한 자신이라고 할까 깊은 믿음을 갖게 하고, 평화를 구축하고 우리 사회를 민주주의와 인권으로 나아가게 하는 데 큰 힘이 될 것이다.
한국전쟁을 깊이 이해할수록 현재 한국 사회를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건 우리 사회가 어떤 사회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나침반과 같은 역할을 해줄 수 있다.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130821150209
박정희 살린 6.25? "전쟁 덕 톡톡히 봤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3> 한국전쟁, 세 번째 마당
김덕련 기자, 최하얀 기자
프레시안 : 전쟁을 겪으며 가족과 헤어진 이도 많았다.
서중석 : 전쟁고아, 전쟁미망인, 이산가족이 많이 생겼다. 전쟁이 나면 (대개) 남성은 총알받이가 되고 여성도 큰 고통을 당하는데, 한국전쟁도 예외가 아니었다. 내가 1948년생인데, 우리 또래가 전쟁고아가 많이 됐다. 1950-1960년대엔 참 고아원이 많았다. 남-남 이산가족이 많이 수용됐고, 북한에서 내려온 어린애들이 부모를 놓쳐 수용된 경우도 많았다.
고아원은 원조 물자 운용과도 관련이 많았다. 원조 물자가 그리 많이 갔다. (많은) 고아원이 원조 물자로 운영되다시피 했다. (고아원 운영을) 외려 돈 버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경우도 일부 있었다. 참고로, 원조 물자 분배를 기독교 단체 등에서 대행한 것이 교인 수가 늘어나는 데 큰 영향을 주기도 했다.
프레시안 : 정부 차원에서 전쟁고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은 있었나.
서중석 : 내가 문제 삼는 게 그거다. 이승만 정부도, 박정희 정부도 고아원에 있는 아이들이 부모를 만날 수 있게 해주는 운동을 (사실상) 안 했다. 조금이라도 민(民)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는 사람들이었으면,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1983년 KBS에서 이산가족 찾기 TV 생방송을 했다. 반응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KBS 건물 담벼락엔 헤어진 가족을 찾는 벽보가 수만 장 붙었다. 이산가족 찾기 신청을 한 사람이 10만 명이 넘었고 이 중 1만189명이 상봉했다.
당시 <신동아> 기자로 일하면서 매일 거기 가서 살다시피 했는데, 그때 생각을 많이 했다. '왜 이걸 10년 전, 20년 전에는 안 했나.' 반공 체제가 느슨해지고 긴장이 완화될까 두려워 안 한 것 아니겠나. 한국전쟁의 슬픈 이야기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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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이 진행되던 1983년 7월 여의도 KBS 광장. 헤어진 가족을 찾는 전단이 바닥에 카펫처럼 깔렸고, 가족을 찾는 이들이 인산인해를 이뤘다. ⓒ연합뉴스 |
정전 후 30년 만에야 이산가족 찾기 운동…이승만·박정희는 왜?
프레시안 : 전쟁을 겪으며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도 변화가 생겼다고 앞에서 이야기했다.
서중석 : 전쟁으로 엄청난 피해를 보긴 했지만, 그와 동시에 전쟁을 겪으며 변화된 여성의 모습이 나타났다. 조선 전기까지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조선 후기 이래 여성들의 경제권과 사회적 권익이 아주 약화되고 여성이 경제적으로 남편에게 종속되는 면이 강했다. 그런데 한국전쟁으로 말미암아 남성이 많이 죽고, 또 크게 다쳤다. 그러다 보니 여성이 집안을 꾸려야 하는 경우가 아주 많아졌다. 시부모를 봉양하고 시동생을 가르치고 자기 새끼들도 먹이고 가르쳐야 하는 문제에 직면한 거다.
이에 따라 여성이 가장으로 나서거나 그전보다 집안일에서 더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됐다. 농촌뿐만 아니라 동대문시장, 남대문시장, 부산 국제시장처럼 도시에 있는 큰 시장들에서도 여성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이건 전쟁 이후 변화된 여성상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상당히 큰 포목점 같은 걸 하면서 시장에서 힘을 발휘했고, 그게 안 되면 명동에서 달러상을 하거나 극장에서 암표상이라도 했다. 남성들이 어쩔 수 없이 여성의 사회적·경제적 진출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점점 가게 된 거다. 그전과 비교하면 큰 변화다.
프레시안 : 다른 측면에서도 변화가 있었을 것 같다.
서중석 : 그런 것(경제적 진출 확대) 못지않은, 어떤 면에선 더 큰 게 성의 변화라고 볼 수 있다. 지금도 여성에게 극도의 정절을 강요하는 사회가 있지 않나. 우리 사회에도 그런 것이 조선 후기부터 해방 직후까지 있었다. 여성이 정조를 뺏기면 자살해야 하는 경우가 생기고, 싫어하는 남성이라 하더라도 그 남성이 윽박질러 성관계를 맺으면 결혼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풍조까지 있었다. 그만큼 여성의 성이 무시당했다.
자주 생각나는 사례가 있다. 일제 때 사회주의 양대 세력이 있었는데, 그중 한쪽 활동가의 부인을 반대편 사회주의자가 강제로 욕보인 일이다. 이 일로 그 여성은 자살했다. 난 그 여성이 목숨을 끊은 건 (여성이 성적으로 치욕을 당하면) 자살해야 한다는 풍조를 따른 건 아니라고 본다. 그 여성이 그 정도 수준은 넘었을 거라고 본다. 문제는 반대편 사회주의자다. 사회주의자라면 근대적인 연애 사상을 갖고 성 문제에 대해서도 그렇게 사고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가장 전근대적인 방식으로 여성을 굴복시키고 욕보임으로써 상대 파벌을 욕보이고 굴복시키겠다는 식의 사고를 하고 여성에게 그렇게 했다. 이런 게 한 시대의 분위기를 잘 얘기해준다. 한국 사회가 그런 면이 강했다. 그런데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분위기가 많이 변했다.
<자유부인>이 중공군 50만에 해당하는 적?
프레시안 : 그런 모습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는 어떤 것이 있나.
서중석 : 대표적인 게 정비석 소설 <자유부인>이다. 1954년 정초부터 <서울신문>에 연재돼 아주 큰 사회적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대학 교수, 변호사, 문인, 그리고 작가 정비석 사이에 아주 재미난 논쟁이 벌어졌다.
제일 문제가 된 게 교수 부인이 연애를 할 수 있느냐(는 거였다). 한 서울대 교수는 '저속하다'고 지적했다. (서울대 법대 황산덕 교수다. 황 교수는 '교수 모욕', '중공군 50만 명에 해당하는 적'이라고 <자유부인>을 비판했다. <편집자>) (교수 부인이) 대학생하고 키스하고 품에 안고 댄스까지 했다는 건 도무지 용납될 수 없다는 게 보수적인 정치인과 여성들의 사고였다.
당국에선 (<자유부인>이 현실을 어둡게 묘사했다며) 정비석이 빨갱이들의 사주를 받고 그런 걸 쓴 것 아니냐고 추궁했다. 뭔가 사건만 생기면 빨갱이하고 연루시키는 게 그 당시 사회 분위기였다. 노동 문제만 생기면 다 '배후에 빨갱이가 있다'고 하고 (1960년) 마산의거가 생기면 또 '배후에 빨갱이가 있다'고 하면서 족치던 사회 아니었나. 정비석도 당국에 끌려가 조사를 받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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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중석 : 그땐 그런 사회였다. (1956년) 영화로도 나왔는데, 이때는 검열에 걸렸다. 제일 문제가 된 게 키스신이었다. (대학생과) 포옹하는 장면, 댄스신도 풍기 문란이라고 문제 삼았다. 그런 이유로 상영을 못하게 해 사회 문제가 됐다. 그래서 나중에 일부 장면을 삭제하고 상영했다. (개봉 전날 정오까지 상영 허가가 나지 않았다. 키스신 등을 덜어낸 후에야 겨우 개봉할 수 있었다. <편집자>)
영화는 공전의 히트를 쳤다. 그 무렵엔 <자유부인>처럼 10만 명 넘게 본 영화가 별로 없었다. 소설도 참 많이 팔렸다. 그때는 5만 부 이상 팔린 책이 거의 없었다. <자유부인>하고 <얄개전>, <영어구문론>이 당시 5만 부를 넘긴 책들이다. (소설 <자유부인>은 14만 부나 팔렸다. <편집자>)
프레시안 : 키스신이 그렇게 큰 논란이 됐다는 게 요즘 세대 눈엔 신기하게 비칠 것 같다.
서중석 : 재미난 글이 있었다. <한국일보> 사설로 기억하는데, 이런 내용이었다. '도대체 지금 우리 사회에 남 앞에서 키스를 하는, 무지몰각하고 비도덕적인 짓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개탄해 마지않는다.' 한마디로 키스신을 용납해선 안 된다는 거였다. 그 영화가 문제가 됐을 때 일부 국회의원은 물론 여성 운동을 주도하던 사람들도 상영을 반대했다. (여성 단체는 소설 <자유부인>이 논란이 됐을 때 '여성을 모독하는 작품'으로 <자유부인>을 공격하기도 했다. <편집자>) 참고로, 키스신이 들어간 최초의 한국 영화가 <자유부인>은 아니다. 1954년에 나온 <운명의 손>이라는 간첩 영화에 처음 등장했다.
전쟁과 여성, 그리고 1950년대
프레시안 : <운명의 손> 역시 <자유부인>을 만든 한형모 감독이 만들었다. <운명의 손> 여주인공이 입술에 담뱃갑의 셀룰로이드를 붙이고 키스신을 찍었음에도, 여주인공의 남편이 감독을 고소하는 한편 남자 배우를 죽이겠다고 협박했다는 기록을 본 적이 있다.
서중석 : 1955년엔 박인수 사건이 일어났다. (이화여대생을 포함한) 70여 명의 여성을 농락한 사건으로 알려져 있는데, 당시 두 가지가 화제가 됐다. 하나는 이 여성들 중 이른바 '처녀'는 1명뿐이었다는 박인수의 말이다. 여대생이 별로 없던 시절이었고, 이대생이라 하면 지위가 굉장한 사람으로 이해되던 때라 더 화제가 됐다. (사회 전반적으로) 성적으로 문란했는데도 여성한테만 아주 심하게 정조를 요구하던 때여서 더 그런 측면도 있다. 다른 하나는 1심 판결에서 판사가 "법은 정숙한 여인의 건전하고 순결한 정조만 보호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박인수와 관계를 맺은 여성이 잘못한 거라는 판결이었다. (이런 논리에 따라 박인수는 1심에서 공무원 사칭 부분만 유죄 판결을 받고, 간음 부분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편집자>) 물론 2심에 가서 뒤집혔다.
그런데 이 시기 재판에 다른 면이 있다. 여성들이 (간통죄 사건 재판정에) 그렇게 많이 몰려들어서 항의하고 소리를 질렀다. 법정에 못 들어간 여성들이 창문에 매달려 지켜보는 일도 있었다. 전 부흥부 차관 부인의 간통죄 사건 때는 여성들이 법정을 메우고, 차관을 욕하면서 부인을 응원했다. 부인이 무죄 선고를 받자 여성들의 함성 소리가 법정에 울려 퍼졌다고 한다. 여성들이 그간 쌓인 억울함을 그렇게 풀며 재판에 적극 참여하는 모습이 나타난 거다.
프레시안 : 그런 측면과 다르게, 대체로 이 시기 여성의 삶은 고단하고 사회적 지위 또한 여전히 낮지 않았나.
서중석 : 축첩이 굉장히 많던 시대였다. 조선 후기에도 그렇고 일제 때도 그렇고, 축첩을 남자의 위신을 세우는 방편처럼 여기는 아주 나쁜 풍조가 있었다. 전쟁으로 남성을 잃은 여성이 많았는데, 이들에겐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 많지 않았다. 성적 욕구를 해결할 방법도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경찰, 군인, 지역 유지 등의 첩으로 가는 경우가 많았다.
미군을 비롯한 군대가 주둔하는 곳의 기지촌 여성들의 삶도 고단했다. 이렇게 몸을 팔거나 첩이 돼야 하는 기구하고 고통스러운 일이 늘어난 것도 전쟁과 관련 있다. 그러나 전쟁을 거치면서 성적 자유가 확대되는 측면이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댄스홀이 1950년대에 많이 퍼진 것도 그런 것의 하나로 볼 수 있다. (1960년대에) 5.16 정권이 한 일 중 하나가 댄스홀을 습격해서 거기 있던 남녀를 잡아들인 거였다. 깡패 소탕과 마찬가지로 그것(댄스홀 습격)을 사회적 개가로 이야기하고 그랬다. (정리하면) 전쟁을 거치면서 성적 자유가 확대된 것과 함께 여성의 정당한 항의가 늘어나고 그게 여론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
억울한 죽음, 그럼에도 시신조차 수습하기 어렵던 시대
프레시안 : 다른 주제에 대해 이야기해봤으면 한다. 지난 6월, 한 조사에서 고교생 응답자의 69%가 '6.25는 북침'이라고 답했다고 언론이 보도하자 박근혜 대통령이 이를 인용해 역사 교육이 문제라고 강조해 논란이 일었다. 박 대통령은 그 직후 한국전쟁 참전 용사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6.25전쟁을 정확히 알리는 올바른 역사 교육을 반드시 해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서중석 : 고교생은 말할 것도 없고 대학생 중에도 한국전쟁, 4월혁명, 6월항쟁 같은 현대사의 중요한 문제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역사 교육을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가 계속 나오지만, 교사들이 학교에서 제대로 가르칠 시간도, 여건도 마련돼 있지 않다. 근현대사는 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논란이 된 조사에서) 중요한 건 문항을 어떤 식으로 제시했느냐다. 남침, 북침은 어려운 단어다.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 이유로 조사 결과가 사실과 다르게 나올 수 있는 거다. 그런 건데, (대통령이) 과잉 반응을 한 측면이 있다.
프레시안 : 매년 그랬듯, 올해도 어김없이 6월에 '잊지 말자 6.25'를 강조하는 보도가 적지 않았다.
서중석 : 이미 반세기 넘게 지났다. 역사적으로 한국전쟁을 어떻게 되돌아볼 것인가,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40-50년 전과 지금은 관심 분야가 많이 다를 수밖에 없다. 현재 시각에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잊지 말자 6.25', '상기하자 북괴 만행' 같은 것들은 1950-1960년대에 많이 나왔던 구호들이다. 아주 강렬한 색채의 그런 반공 구호들이 지금도 적절한 건지 고려해야 한다. (1987년) 6월항쟁 이전까지는 극우 반공주의가 위력을 발휘했다. 그렇기 때문에 '잊지 말자 6.25', '상기하자 북괴 만행'에 초점을 맞춰 한국전쟁을 이해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그 속엔 수십 년 동안 꽉 막혀 질식된 것들이 있었다. 뭐냐 하면, 한국전쟁 기간 동안 (학살 피해를 비롯한) 엄청난 수난과 고통이 발생했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없게 만든 것이었다.
프레시안 : 1950-1960년대 분위기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줬으면 한다.
서중석 : 내가 어릴 땐 한국전쟁의 참화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부모가 (전쟁 때) 죽었다는 집도 꽤 여럿 있었다. 집단 학살이란 말이 의미하듯이 한 마을에서 수십 명이 같은 날 죽은 경우도 많지 않나. 그런데 서로 얘기하기를 아주 꺼렸다. 동네에서 함께 제사를 지낼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못하거나 곡도 제대로 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었다. 겁이 나서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하는 일도 꽤 있었다.
프레시안 : 시신을 수습하다가 자칫하면 빨갱이로 몰릴 수도 있었기 때문 아닌가.
서중석 : 그렇다. 당장 어떻게 될까봐 못하기도 했고, 연좌제 때문이기도 했다. 연좌제에 걸리면 육사 입학이나 공무원 임용은 물론이고 1970년대에 중동 같은 해외에 나가는 데도 제약이 많았다. 연좌제에 걸린 사람 중 많은 수는 학살 피해 가족이었다. 군대와 경찰이 마구잡이로 죽였는데, (살아남은 가족들은 그 이후까지) 그 큰 고통을 당해야 했다. 1950년대엔 이런 문제에 대해 쉬쉬했다. 아무 말도 못했고 사회 문제화할 수도 없었다.
그러다 6월항쟁이라는 새로운 역사적 계기가 생기면서 비로소 보도연맹 학살을 비롯해 한국전쟁을 전후해 벌어진 그 엄청난 민간인 학살이 어떻게 이뤄졌는지 등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됐다.
프레시안 : 그런 의미에서도 6월항쟁은 현대사의 분수령이라는 생각이 든다.
서중석 : 한 가지 덧붙이면, 1950년대에는 '북괴의 학살 만행'이란 말을 그렇게 많이 했던 것 같진 않다. 이승만 대통령의 6.25 담화들을 찾아서 쭉 읽어봐도, 인민군 또는 북한 공산당의 집단 학살 만행을 언급하는 대목이 별로 없다. 집단 학살이 있던 직후였기 때문에 대통령 담화에도 그런 상황이 반영된 것 아닌가, 학살 만행을 언급하더라도 1970년대에 언급한 것과는 많이 다른 것도 그 때문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 후에도 집단 학살이라는 말은 잘 안 쓰고 대개 '북괴의 학살 만행'이라고 불렀는데, 이게 집중적으로 교육된 건 1970년대에 들어오면서다. (그에 앞서) 1968년에 김신조를 비롯한 (북한 게릴라들의) 청와대 습격 시도 사건, 푸에블로호 사건, 울진·삼척 무장 게릴라 침투 사건이 터졌지만 그때만 해도 그런 교육이 그렇게 심하진 않았다. 그런 교육이 집중적으로 이뤄진 건 유신 체제, 특히 1975년 인도차이나 사건(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 공산화. <편집자>) 이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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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
프레시안 : 한국전쟁을 객관적으로 이해할 필요성을 이야기했다. 전쟁에 어떤 이름을 붙일 것인지도 여전히 논란거리다.
서중석 : 6.25전쟁이란 말에도 일정하게 의미가 있기 때문에 사용할 수도 있다고는 본다. 6월 25일 전쟁이 일어났다는 건 상당히 중요하다. (<한국전쟁의 기원>을 쓴) 브루스 커밍스는 그전부터 연속적으로 벌어진 사태가 더 큰 전쟁으로 확대된 게 한국전쟁이기 때문에 연속적인 남북 관계와 국지전의 연장선에서 전쟁을 봐야 한다는 걸 상당히 중시한다. 난 그렇진 않다고 본다. 6월 25일 이전에 벌어진 국지전과 6월 25일 발생한 전쟁은 여러 면에서 차이가 있다. 그런 점에선 6월 25일에 전쟁이 났다는 것이 의미가 있다.
그렇지만 남북한 간에만 전쟁이 벌어진 게 아니다. 작전을 주도한 건 미군과 중국군이었다. 화력은 물론 병력에서조차 미군이나 중국군이 국군이나 북한군보다 더 많았던 때가 많다. 그리고 한국전쟁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빼고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나라가 참전한 국제전이었다. 내전의 성격도 지녔지만 발발부터 국제전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6.25전쟁이라는 표현도 그렇고 요즘 학생들이 배우는 역사책을 보면 이런 국제전적인 성격이 너무 약하(게 다뤄지고 있)다. 그런 식으로는 이 전쟁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도 한국전쟁이라는 말이 더 적절하다. 한국전쟁이란 표현은 Korean War를 번역한 것이라는 점에서 조선전쟁으로도 표현할 수 있다.
한국전쟁과 군대의 팽창, 그리고 박정희
프레시안 : 앞에서 박근혜 대통령과 한국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잠시 했다. 박 대통령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여순사건 후 진행된 숙군(군대 내 좌익 색출) 과정에서 예편을 당한 박 전 대통령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1950년 6월 30일) 현역으로 복귀했다. 이를 감안할 때 박 전 대통령이 부활할 수 있는 길을 한국전쟁이 열어준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서중석 : 어떤 글인가에서 '6.25전쟁이 박정희를 살렸다'는 논조로 쓴 걸 읽고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이렇게도 해석을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1948년 여순사건 이후 군 프락치 색출 작업이 진행됐다. 그 속에서 박정희가 남로당의 중요한 프락치였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러면서 박정희가 자수를 하게 되고, 그 후 중형을 선고받고 군복을 벗게 된다. 이것이 전쟁이 일어나기 전 박정희의 모습이었다.
숙군 과정에서 상당히 많은 장교가 처형을 당했다. 그런데 박정희는 살아났다. 그 이유에 대해 많은 사람이 '박정희가 굉장히 기회주의적인 것 아닌가. 남로당에 들어간 건 (사회주의자였던) 형 박상희(5.16쿠데타의 주역인 김종필의 장인. <편집자>)의 죽음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어쨌건 당시 남로당이 세력이 있어 보였기 때문인 것 같은데, 잘 안될 것 같으니 같이 일했던 남로당 프락치들의 인적 사항을 알려주고 혼자 살아난 것 아니냐'고들 한다. 또 백선엽·김창룡 같은 '만군파'(일제 때 만주군 출신 인사들. <편집자>)가 적극 구명한 덕에 살아난 것 아니냐고도 이야기한다. 그런 것들과 함께, 박정희가 살아난 건 가장 중요한 정보를 줬기 때문 아니겠는가, 그만큼 사람이 자기 자신을 180도 바꾼 것이고 그것을 해당 기구에서 인정했기 때문에 살아남은 것 아니겠느냐고 볼 수 있다.
한국전쟁이 난 후 김창룡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중 하나가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를 복직시킨 것이었다. 안두희는 (전쟁 발발) 당시 감옥소에 들어가 있었다. 재판장에서 안두희가 '대한민국을 위해 김구를 살해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니까 변호사가 '안두희는 국가에서 표창해야 할 인물'이라고 했고, 공판장 주변엔 '안 의사'라고 치켜세우는 벽보가 붙고 그랬다. 이승만 정부는 안두희의 계급을 올려주기까지 했다. 전쟁 발발 후 (군은) 안두희를 복직시키고 나중에 예편할 때까지 아주 편안하게 잘 모셨다. 어떤 특명 아래 움직여 그렇게 됐다(고 봐야 한다).
같은 일이 박정희한테도 일어난다. 군에 복귀할 수 있게 된 거다. 강제 예편을 당한 후 박정희는 육군본부 정보국장이던 백선엽의 배려로 정보국에서 문관으로 일하다 전쟁을 맞았다. 그리고 전쟁이 난 직후 현역으로 돌아왔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박정희가 그렇게 쉽게 군복을 다시 입기는 어려웠을 거다.
박정희는 전쟁 중에 군공을 세우거나 한 건 별로 없었다. 소득이 있었다면, 군에 다시 복무하게 되면서 육영수 씨하고 재혼하게 된 거다. (전체적으로) 한국전쟁이 박정희에게 좋은 기회를 만들어준 건 틀림없다. 박정희가 전쟁의 덕을 톡톡히 본 건 맞지만, 6.25가 박정희를 살려줬다고까지 보는 건 과한 표현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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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전 대통령은 현대사에서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문제적 인물이다. 사진은 2011년 11월 14일 박 전 대통령 생가(경북 구미) 부근에 세워진 고인의 동상 제막식 모습. 박근혜 대통령이 밝은 표정을 짓고 있다. ⓒ연합뉴스 |
프레시안 : 박 전 대통령 개인사와 별개로, 한국전쟁을 거치며 군대가 급속히 팽창했다는 건 짚어야 할 대목이다. 그걸 통해 5.16쿠데타의 토대가 마련된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한국전쟁은 정치에 큰 영향을 끼친 게 아닌가 한다. 북한 역시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그 이전보다 더 김일성 중심으로 권력이 재편된 것도 주목할 만하다.
서중석 : 한국전쟁은 남한과 북한을 극도로 단순화된 사회로 만들었다. 남쪽은 극우 반공 체제가 됐다. 북쪽도 마찬가지인데, 본래 북한 정권이 수립될 때는 여러 세력이 권력을 나눠가졌으나 전쟁을 겪으며 숙청이 계속됐다. 그러면서 나중에 수령 유일 체제로 가게 된다. 한국전쟁은 남과 북에서 모두 한쪽으로 치우친 권력을 갖게끔 했고, 남북 모두 군인이 지배하는 사회로 나아가게 하는 데도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남한의 경우, 30년간 군대의 획일화된 사고와 문화가 사회를 지배했다. 그런 단순화가 지금까지도 한국 사회를 괴롭히고 있지 않나.
(군의 팽창도 중요한데) 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10만도 채 안되던 한국군이 전쟁이 끝날 때는 60만에 육박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1953년 10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고 미국에 계속 요구하면서 병력이 72만까지 늘었다. 미국이 경고를 많이 했다. 병력이 너무 많으면 나중에 큰 짐이 될 거라고. 당시 국방비는 대부분 미국 원조로 충당했다. (미국이 제공한 원조 물자를 팔아 마련한 돈을 대충자금이라고 했는데, 대충자금 지출 중 가장 큰 항목은 국방비였다. <편집자>) 그렇다고 해도 한국 정부가 져야 하는 짐도 많을 수밖에 없었다. 72만 병력을 도무지 어떻게 할 수 없으니까 나중에 60만으로 감축하게 된다.
장교들은 미국 가서 연수와 훈련을 받으면서 대단히 강한 엘리트 의식을 갖게 된다. 집단성이 굉장히 강한 조직이기도 했고. 1950년대 말부터, 한국은 군대가 지배하는 사회로 갈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5.16쿠데타를 계기로) 그게 이뤄지는 거다.
프레시안 : 못다 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를 기약하고 이만 정리했으면 한다.
서중석 : 해방과 한국전쟁은 한국 사회를 혁명적인 상황으로 바꾸어 놓았다. 다만 신기할 정도로 한국 사람들이 그걸 잘 인식하지 못했다. 해방과 한국전쟁은 한국 사회를 연속 혁명으로 변화시켰는데, 우리가 이 점을 대개 놓치고 있다. 이제라도 깊이 있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130917181054
기사입력 2013-09-22 오전 12:51:19
"뉴라이트·이승만, '용서받지 못할 자' 비호"[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4> 친일파, 첫 번째 마당
김덕련 기자, 최하얀 기자
프레시안 : 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난 지 오래됐는데도 친일파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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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학사 교과서. ⓒ교학사 |
반민족 행위를 해방 후 속죄하고 반성하면서 자기 분야에서 양심껏 살아가려는 노력을 했다면 (지금 같은) 친일파 문제가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친일파(와 그 후예)가 수십 년간 권력을 장악하지 않았나. 그 후 한국이 개방적인 사회로 가면서, (저들이) 권력에서 소외되는 경우도 생겼다. 그러면서 (저들이) '이 권력을 어떻게든 놓아서는 안 된다' 하게 됐고, 그런 것이 친일파 문제가 계속 생기는 이유가 아닌가 한다. 이승만 정권, 유신 체제 때도 잘 드러난 건데, 친일파의 중요한 특징은 권력을 맹신한다는 것이다. 권력을 계속 움켜쥐려면 상대방을 '종북' 같은 걸로 공격하는 것과 동시에 자신들의 뿌리와 연관된 것을 미화할 수밖에 없다. 그게 결국 친일파 옹호로 나타나고, 이번 교과서 문제로도 드러난 것 아닌가 한다.
프레시안 : 친일파라는 용어가 적절한가 하는 의문을 품는 이들도 있다. 엄밀한 개념이라기보다는 감정적인 표현 아니냐는 의문이다.
서중석 : 사실 그 문제는 학계에서 수십 년간 얘기됐다. (친일파란 말이) 감정적이고 비학문적인 용어 아니냐, 다른 용어를 쓰는 게 적절하지 않냐는 얘기였다. 그런데 친일파 대신 다른 말을 쓸 경우 부적절하다란 생각이 더 든다. 다른 말을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런 것들이 한말부터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친일파의 행위를 포괄할 수 있는 용어인가 할 때 부족한 부분이 많이 보인다.
친일파란 단어 속엔 근현대사가 녹아 있다고 할까, 한국인의 역사의식 같은 것들을 잘 보여주는 면이 있다. 한마디로 친일파(란 말)처럼 그들의 속성을 잘 보여주는 용어는 없지 않나 (하는 거다). (정리하면) 친일파라는 단어에 문제를 느낄 수는 있지만 친일파를 일반적으로 분석하고 얘기할 때는 적절한 것 같다.
'용서받지 못할 자' 비호하는 뉴라이트와 수구 언론
프레시안 : 해방 직후엔 어땠나.
서중석 : 해방 직후에도 친일파란 말을 썼다. 일제 때도 많이 썼고. 다만 1947년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서 친일파 처단법을 만들 때 '부일(附日) 협력자'란 말을 썼다. 부일 협력자란 표현도 어느 정도 사용됐다.
왜 이 친일파란 단어가 그렇게 한국인한테 주는 의미가 분명하냐. 예컨대 유럽의 경우 프랑스에 친독파, 독일에 친영파가 있을 수 있다. 그 말엔 '문제가 심각하다'는 인식이나 죄의식 같은 게 들어 있지 않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식민 지배를 겪은 인도에서 친영파, 필리핀에서 친미파란 딱지를 붙여 영국 혹은 미국과 관계가 있었던 자국인을 매도하는 경우도 별로 없다. 다른 동남아 국가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한국에서 친일파라고 할 때는 인도차이나의 친불파, 인도의 친영파, 필리핀의 친미파와 그 뜻이 상당히 다른 것 같다. 친일파 하면 우선 대한제국 말기 매국노가 연상된다. 을사오적이 제일 많이 알려져 있지 않나. 나라 팔아먹는 데 앞장섰던 이완용, 송병준 같은 악질 친일파를 많이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3.1운동 이후 독립 운동이 활발해지자 그걸 탄압하는 데 앞장서고 민중을 감시한 자들을 친일파로 많이 본다.
1930년대 이후 특히 전시 체제로 갈수록, 한국인들은 친일파에 대한 반발심을 더 강하게 갖게 된다. 억압의 강도도 월등히 심해질 뿐만 아니라 공출이나 강제 동원 같은 것들에 앞장선 자들이 한국인 가운데 많았기 때문이다. 군국주의 침략 전쟁에 나가라며 학병과 징병에 응하도록 권하거나 전쟁을 찬양하는 글을 쓰는 등의 방식으로 전쟁 협력 행위를 한 자들도 많았다. 무엇보다 일제 말에 민족의식을 완전히 말살하고 일본인화해야 한다고 주장한 황국 신민화 운동도 벌어지지 않았나.
친일파 하면 (사람들에게) 이런 것들이 연상된다. 그러니까 한국인에게 친일파는 용서받지 못할 자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친일파는 유럽의 나치 협력자와 거의 같은 뜻을 지녔다고 볼 수도 있다.
프레시안 : 일제 치하에서 일본에 협력하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고 보는 시각도 있다.
서중석 : 그런 주장은 친일파가 해방된 그날부터 참 줄기차게 펼친 거다. (예컨대) 한국인 중 (일제에) 세금 안 낸 사람이 어디 있느냐(는 식의 주장이다). 세금 중엔 농사짓는 데 꼭 필요한 수리세 같은 게 있다. 또 담배를 피우면 연초세를 물어야 한다. (일제 치하라고) 담배 안 피울 수 있나. 수리세 내고 연초세 냈다고 해서 일제에 협력한 건가? 그리고 강제 동원돼서 끌려가고 강제 공출된 것, 이런 것도 일제에 협력한 건가? 그 당시 한국인 중 어느 누구도 이런 걸 일제에 협력한 거라고는 안 봤다. 당시엔 왜정 치하라고 했는데, 왜정 치하에서 악독하게 당한 거라고 봤다. 해방된 그날부터 문제 삼은 건 처단하지 않으면 안 되는 악질 친일파다.
독일의 경우를 봐도, 제2차 세계대전 때 히틀러 지시로 전쟁에 나간 군인이나 공무원들을 다 협력자라고 몰아세우지도, 재판에 붙이지도 않았다. 모두 반성해야 하는 행위임에는 틀림없지만, 그중 문제가 많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는데 전부 단죄 대상으로까지 얘기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는 견해가 많았다.
프레시안 : '그땐 다 협력했다'는 식의 공범론은 부적절하다는 뜻인가.
서중석 : 그렇다. 그런 식으로 (친일파가) 물귀신처럼 물고 늘어지는 것이다. 수렁에 같이 빠져 같이 죽자는 참 파렴치한 논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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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
해방 후 반성은 없고 원성만 키운 악질 친일파
프레시안 : 해방 직후 사람들은 친일파 문제를 어떻게 봤나.
서중석 : 대다수의 한국인은 해방을 정말 감격스럽게, 꿈같이 맞이했다. 그와 달리 공포 속에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심정으로 맞이한 사람들도 있었다. 악질 친일파다. 해방 직후 친일파 중 악질들은 다 도망쳤다. 당시 기록을 보면, 경찰의 경우 80% 넘게 뺑소니쳤다. 미군이 들어와서 '현직에 복무하라'고 지시할 때까지 무서워하며 도망 다니는 데 바빴다. 해방 직후 대중이 악질 친일파에 대해 얼마만큼 분노에 떨고 있었는가 하는 걸 단적으로 얘기해준다.
대부분의 정치 세력도 이구동성으로 친일파를 처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만, 한국민주당(한민당)이 '친일파 문제는 차차 (처리)해도 된다'는 식으로 얘기했다. 그래서 한민당은 친일파 옹호파란 얘기도 많이 들었다. 또 이승만이 한국으로 돌아와 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촉중협)를 조직하는데, 여기서도 '친일파 처단을 지금 꼭 해야 하느냐'는 식의 얘기가 나왔다. 한민당도 그렇지만 독촉중협에도 친일파가 많이 들어가 있었다.
안재홍 같은 중도 우파는 해방 직후 친일파 처단에 적극적이었다고 보기 어려운 면이 있다. 해방 직후 우익이 좌익보다 약했던 분위기 등을 반영해 친일파 문제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거다. 그런데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미소공위)가 휴회한 1946년 5월 이후 좌우합작 운동에 참여하면서 안재홍 등 중도 우파가 친일파 처단 주장을 상당히 하는 걸 볼 수 있다.
그렇게 된 건 해방 후 친일파가 한 짓이 (이들에게) '이거 큰일 났다. (친일파가) 우리 사회를 망치는 존재 아니냐'는 위기의식을 갖게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해방 후 부정부패가 무지하게 심했는데, 이걸 척결하려면 친일파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갖게 한 거다.
사실 일제 때 친일파가 부정부패를 정말 잘했느냐고 하면 그렇진 않다. 조선총독부가 그런 것에 상당히 엄격한 면이 있었기 때문에, (친일파가) 부분적으로 불법을 저지르긴 했지만 노골적인 부정부패 행위를 하긴 어려웠다. 그런데 해방 직후엔 친일파가 어디서나 부정부패와 관련돼 나타난다.
또 한국이 민주주의 사회로 가야 한다는 게 해방 후 대세였다. 그런데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데 있어 친일파가 암적 존재라는 생각을 많이 갖게 했다. 안재홍 같은 사람도 그걸 우려했다. '미소공위가 휴회하면서 분단으로 치달을 가능성도 있는데, 친일파가 그야말로 분단 세력 아닌가. 분단만이 살길이라며 단정 운동에 앞장서지 않았나. 새 나라를 세우는 데 있어 친일파처럼 심각한 문제가 없다.' 이런 생각을 많이 갖게 했다.
프레시안 : 그렇잖아도 어려웠던 해방 직후 상황에서 부정부패는 경제에 치명타였을 것 같다.
서중석 : 해방 직후 '친일파를 빨리 처단해야 한다'는 주장이 많이 나온 건 민중을 억압하고 고문한 악질 친일 경찰 때문이다. 친일 경찰은 (1946년) 10월항쟁, (1948년) 4.3사건과 여순사건이 일어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런데 사실 해방 직후 서민들이 친일파에 대해 악감정을 많이 품게 된 또 다른 이유는 친일파가 모리배 짓을 많이 해서다. 이게 신문 자료에 참 많이 나온다. 일제 말에도 생활이 굉장히 어려웠지만, 해방되고 또 얼마나 어려웠나. 모두 허리띠 졸라매고 같이 고통을 참으면서 어떻게 하면 이 경제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하는데, 친일파는 오히려 때를 만났다고 생각하고 미군정 등 권력과 결탁해 쌀 같은 걸 매점매석했다.
해방된 해 남쪽은 풍년이고 북쪽은 흉년이었는데, 나중에 남쪽에서 품귀해서 쌀 소동이 일어난다. 10월항쟁이 일어난 것도 쌀 문제와 관련이 있다. 일제 말에 고무신을 비롯한 생필품을 배급했고, 해방 후에도 그중 일부는 배급했다. 그런 생필품을 마구잡이로 사재기했다가 값이 뛰면 팔고 그러니까 모리배에 대한 원성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친일파가) 우리 생활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원흉 아니냐. 따지고 보면 모리배가 다 일제 때 악질 친일 행위를 한 자들이다. 경제가 잘 풀리기 위해서라도 친일파를 빨리 처단해야 한다'는 논리가 많이 나타난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
친일파 되살린 미군정과 이승만
프레시안 : 그런 친일파가 살아나는 과정에서 미군정과 이승만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서중석 : 잘못 유포된 주장 가운데 하나가 해방을 무조건 혼란기로 보려는 견해다. 해방 직후엔 그렇게까지 심한 혼란은 없었다. 살상 행위라든가 치안을 크게 어지럽히는 행위 같은 건 없었다. 역설적인 현상이지만 미군정이 설치되면서 오히려 혼란이 많이 일어났다. 미군이 친일파를 적극 등용하면서 그런 일이 생긴 것이다.
친일파 처단의 필요성을 강조한 데는 한국인들의 정의감, 해방 직후에 특히 느낄 수 있던 강한 정의감이 많이 작용했다. 그런데 당시 주요 지도자 중 한 명이던 이승만 같은 사람은 친일파를 옹호했다. 친일파 문제에 대해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한 수준이 아니다. '친일파를 옹호하는 가장 주된 세력이 아니냐', '친일파가 발호하는 온상이다', 이렇게까지 비난을 받았다. 이승만은 주요 지도자 가운데 '친일파를 지금 처단해선 안 된다'고 공공연하게 얘기한 대표적인 사람이었다.
그분은 상당히 교묘하다고 할까, 그런 면이 있었다. 뭐냐 하면 '독립 국가를 수립한 다음에, 우리 정부를 가진 다음에 우리 손으로 처단해야지, 어떻게 남의 손에 처단되길 바라느냐. 외세에 의존해서 하려고 하면 안 된다', 이런 아주 재미난 논리랄까 특이한 논리를 폈다. 이승만은 권력에 굉장히 예민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친일) 경찰 간부들을 감싸거나 치하하는 일들을 많이 했다. 그런 식으로 경찰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적극 노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결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에 이미 여러 경찰서나 지서에선 '이승만이 우리 최고 지도자'라며 그 사진을 걸어둔 데도 있었다고 얘기한다.
프레시안 : 이승만 등이 친일파를 비호하는 속에서도 친일파 청산 노력은 계속됐다. 대표적인 것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다.
서중석 : 1947년, 미군정 산하 기관이라고 볼 수 있는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서 친일파를 단죄하기 위한 법을 만들었다. 한민당, 독립촉성국민회(독촉중협의 후신) 등 이승만을 지지하는 세력의 반대를 딛고 통과됐다. 그런데 미군정은 친일파 청산에 워낙 소극적이어서 이 법을 공포하지 않았다. 김규식은 '그렇다면 입법의원 의장을 사임하겠다'고 강경하게 배수진을 쳤다. (미군정은) 처음엔 김규식의 의견을 존중한다고 했지만 끝내 이 법을 공포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라는 계기를 만나면서, 친일파 처단 문제는 급물살을 탄다. 헌법을 (1948년) 7월 17일 공포하는데, 제101조에 '반민족 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는 조항을 집어넣었다. 정부 수립 전인 8월 5일엔 제헌 국회에서 '친일파 처단을 위한 특별법을 만들 위원회를 설치하자'는 긴급동의안을 냈다. 그래서 그 날짜로 특별법기초위원회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정부 수립 공포 다음 날(8월 16일),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이 바로 국회에 상정된다.
이건 뭘 얘기하느냐면, 제헌 국회가 헌법 다음으로 중요시한 게 친일파 처단이었다는 거다. 그래야만 제대로 된, 좋은 대한민국을 세울 수 있다는 것에 대해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거다. 그렇게 활동하게 된 건 무엇보다 친일파 처단이 긴급하고 절대적인 과제이자 우리 정부가 들어서는 마당에 더는 미룰 수 없는 일이라는 총체적인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제헌 국회 의원들이 그걸 따라가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친일파는 미군정 시기에 이미 클 대로 컸고 이승만 주위에 집결해 있었다. 이들은 제헌 국회에 아주 강하게 반대하는 활동을 했다. 시내에서는 물론이고 국회 안에서까지 삐라를 뿌리면서 그런 활동을 했다. "대통령은 민족의 신성이다. 절대 순응하라", "민족 처단을 주장하는 놈은 공산당의 주구이다" 등이 적힌 삐라였다. 지금 여기저기 '종북' 딱지를 막 붙이듯이, 그때도 친일파가 자기들을 욕하는 사람들을 공산당 내지 그 주구로 몰아붙였다.
그럼에도 이 대통령은 반민법을 공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민법을 공포하지 않으면 양곡 관리 법안 같은 걸 국회가 통과시키지 않을 것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양곡 관리 법안은 도시에 식량을 공급하는 것에 관한 법이었는데, 당시 긴급한 문제였다. 그래서 9월 22일, 할 수 없이 공포한 거다. 공포 다음 날(9월 23일), 친일파는 서울 시내 중심가에서 반공구국궐기대회를 대대적으로 열었다. 이승만 정부는 이걸 눈에 띄게 지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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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제헌절에 남산에 있는 자유총연맹 광장(서울시 중구 장충동)에서 이승만 동상 너머로 대형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다. 이승만 동상은 본래 1956년 남산에 세워졌으나, 1960년 4월혁명 때 시민들의 손에 철거됐다. 이승만 전 대통령을 높게 평가하는 자유총연맹은 2011년 남산에 다시 이승만 동상을 세웠다. ⓒ연합뉴스 |
힘으로 반민특위 짓밟은 이승만과 친일 경찰
프레시안 :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반민특위는 당시 큰 기대를 모았다.
서중석 : 반민특위는 1948년 10월 23일 구성돼 이듬해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1949년 1월 8일 친일파 거두로 원성이 높던 박흥식, 김연수, 최린, 최남선, 이종형, 이광수 등을 구속했다. 이번 (교학사) 교과서에서 옹호하려는 사람들이 여기 많이 포함돼 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 대통령이 아주 강하게 반발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반민특위가) 그해 1월 24일, 이 사람들 못지않게 악명이 높던 친일 경찰들을 체포하기 시작하자 (이 대통령은) "치안 혼란을 조장하는 것"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친일 경찰을)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국회는 그것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 대통령은 반민특위를 공공연하게 비난하는 담화를 발표하면서 (반민특위를 약화시키는 내용의) 반민법 개정안을 냈다. 그런데 국회는 그 개정안이 국회로 오자마자 표결에 붙여 부결시키고 정부로 그대로 이송한다. 그야말로 속사포식으로 일을 처리했다.
어째서 국회가 이렇게까지 나오느냐. 제헌 국회 의원들은 (1948년) 5.10선거에서 당선된 사람들이고 그중 상당수는 이승만 지지 세력, 한민당 계열, 단정 세력으로 볼 수 있다. 그 세력들이 동조하지 않았으면 이런 국회가 성립될 수 없었던 것 아니냐고 얘기할 수 있다. 이건 당시 (친일파 처단에 대한) 국민의 뜻이 얼마나 강렬했느냐를 단적으로 얘기하는 것이다.
프레시안 : 이승만 정부는 결국 힘으로 친일 청산 노력을 짓밟지 않나.
서중석 : 이 대통령은 반민법을 무력화하려 한다. 그러면서 유명한 6.6 반민특위 습격 사건(1949년 6월 6일)이 일어난다. 이걸 단순히 반민특위 습격 하나로만 보면 안 된다. 그 시기에 일어난 다른 사건들, 그러니까 국회 프락치 사건, 6.26 김구 암살 사건과 함께 봐야 한다. 이게 학계 일부에서 얘기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6월 공세다. (이승만의 행위를 학계에서) 역사를 과거로 퇴행시키려는 노력으로 보는 거다.
제헌 국회에서 반민법을 시행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걸려드는 노일환 의원을 비롯한 소장파다. 또 국회 밖에서 김구, 김규식 같은 독립 운동 세력이 강하게 버텨주니까 국회가 그런 활동을 했던 건데, 버팀목이던 김구가 암살되면서 친일파 처단은 결국 유야무야되고 만다.
친일파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가 하는 건 1987년 6월항쟁이 일어날 때까지 친일파 문제가 거의 거론되지 못한 데서 잘 드러난다. 1949년부터 1987년까지 38년 동안 그랬다. 극단적인 극우 반공 체제를 유지하던 시기엔 얘기조차 꺼내기 어려운 문제였다. 친일파 문제는 6월항쟁 이후 한국 사회에 민주화가 자리 잡으면서 (본격적으로) 다시 등장한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다섯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