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관련

행복을 느끼다

호린(JORRIN) 2020. 4. 29. 11:23

아침에 명상한다고 앉았을 때, 얼굴이 굳은 듯하여 얼굴 근육을 푼다고 살짝 미소를 짓다 보니 이런 것을 기억했습니다.

 

석가모니가 득도할 무렵에 명상 중에 행복감을 느꼈다고 했는데, 그 느낌이 어렸을 적에 아버지를 따라가 참석했던 행사에서 홀로 빠져나와 나무 밑에서 명상에 잠겼을 때 느꼈던 그 행복감과 같았다고 했습니다.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대략 그런 내용이라는 것이지 구체적인 정황은 모르겠네요.

 

인간이 행복감을 느낀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인데, 오랜 기간 동안의 고행과 수행 끝에 느낀 행복감이 하필이면 아주 어렸을 때 느꼈던 행복감과 같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어린이는 부모의 보살핌 속에서 기본적인 욕구만 충족되면 행복감을 느끼기가 쉽다는 뜻이고, 우리가 수십 년을 돌고 돌아서 찾아간 행복이라는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두려움 없고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 데서 느낄 수 있는 마음의 상태라는 뜻이겠죠.

 

어린이들은 상표를 따지지도 않고, 체면도 따지지 않으며, 미래에 다가올 세금이나 지급이자 등에 대한 두려움도 없죠. 그들의 고민이라는 것은 우리가 보기에는 너무나 사소한 것 한두 가지이기에 언제든지 현재의 배부름과 부모 사랑의 따뜻함 속에서 머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신의 품 속이라는 천국에서 신의 보호를 받고 있지만, 스스로 신과의 교류를 단절하고 지옥을 만들어 내어 그것을 경험하고 있으니 행복을 느끼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우리 인간은 이미 지나가버린,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기억에서 오는 분노와, 아직 오지 않은, 결코 발생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미래의 불확실에서 오는 두려움으로 마음 속에 지옥을 창조합니다.

 

만약에 지극히 운이 좋아서 로또에 당첨된다면, 인간의 본성은 지극한 기쁨의 순간에 도난, 분실, 강도, 사기 등의 단어를 떠올려 기쁨의 시간보다 두려움의 시간을 더 많이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마치 부모의 보호 속에서 자라는 어린이처럼, 우리가 신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 느낄 수 있고 현재의 상황을 풍족함으로 느낄 수만 있다면, 그것이 저절로 행복감을 유지시켜줄텐데, 우리는 절대로 그렇게 살 수가 없습니다.

 

종교 장사아치와 정치적 선동꾼들은 우리에게 항상 두려운 미래를 제시합니다. 부모들도 자식이 어느 정도 성장하면 미래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자식의 마음에 심어놓습니다. 보험회사의 광고를 보고 나면 20년 후 혹은 30년 후를 대비하지 못했다는 두려움에 밤잠을 설치기도 합니다. 심지어 그런 두려움에 힘들어하는 인간의 간절한 외침에 신은 귀를 닫아버립니다. 이것이 우리의 체험입니다. 이런 체험 속에서 어떻게 행복을 느낄 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사실 두려움은 우리의 선택이고, 우리가 만들어낸 것입니다. 우리가 지옥이라는 환상을 창조하여 그것을 체험함으로써, 우리가 천국에서 단 한순간도 떠난 적이 없다는 것을 체득하고자 함이 우리의 목적입니다.

 

다시 말해서, 수십 년을 돌고 돌아서 원래 있던 자리를 찾아서 돌아오는 여정이 우리의 인생이고, 어머니의 젖을 충분히 빨아먹은 후에 어머니의 품에서 행복감을 느끼며 잠들던 그 시절로 돌아가려고 일부러 그 품에서 벗어나는 것이 우리의 선택입니다.

 

지금 힘들죠? 미래가 안보이죠?

그게 환상입니다. 현재 자신이 머무는 곳이 천국이고, 자신이 선택해서 머무는 것입니다.

 

석가모니가 행한 것처럼, 힘들고 미래가 보이지 않는 현실에서 몇 년간의 고행을 거쳐서, 외부 상황이 바뀐 것은 아무 것도 없지만, 그런 힘든 길을 빠져나가 어렸을 때의 상황으로 돌아가서 행복감을 느낄 것이냐, 아니면 그냥 지금 이 순간 이 자리가 바로 그 순간 그 자리라고 생각하면서 행복감을 느낄 것이냐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선택입니다.

 

그렇습니다. 행복감은 외부 환경이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에 의한 마음의 상태입니다.

힘든 현실이라는 환상에 빠져 살더라도, 자주 행복감을 느끼려고 노력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