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필리핀에서의 삶

수녀들과의 밤...

호린(JORRIN) 2011. 12. 25. 11:52

어제 저녁에 수녀원을 방문했습니다.

 

수녀원 내 성당에서 천상에서 들려오는듯한 수녀들의 노랫가락이 섞인 미사를 지켜보다가 그 경견함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죠. 수녀들만의 미사인데다가 30여명의 목소리를 다 합쳐봤자 제 목소리보다 더 작게 들리는 애잔함 때문에 아무런 반주도 없이 리듬 섞인듯 읊어대는 기도문이 참 거룩게도, 신성하게도 느껴졌죠.

 

그러다가 마지막에 미사를 집전하던 수녀가 제단 비슷한 곳의 보관함을 열어 등불을 집어넣고 몇몇 남아있던 수녀들이 모두 바닥에 업드려 최고의 경배를 드리는 장면은 너무나 순결하고 거룩하게 느껴져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종교적인 용어나 의미는 모르지만 그네들이 찾고자하는 평화의 근원, 그 절대자에 대한 최고의 찬사, 생의 모든 것을 자기 자신의 믿음을 위해 실천할 수 있는 그 고귀함과 순결함, 믿음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던 그 용기...

 

한 30분 후에는 남자 신부와 복사 한 명이 참가한 자정 미사가 진행됐는데, 제일 뒷자리에 앉아 오랫만에 책상다리를 하고 명상도 하고 미사에 주의를 기울여 보려고 노력했지만 가장 많이 할애된 시간은 꼬박꼬박 존 시간이었죠 ㅎㅎ 요즘 운동을 시작해서 너무 피곤해요. 게다가 어제도 저녁에 운동하고 밥먹고 바로 수녀원으로 갔는데, 짧은 시간 운전에도 껌을 씹어야 할 정도였으니 엄청나게 피곤했죠.

 

남들 모두 일어섰다, 구부렸다, 앉았다를 반복하는데 저는 힘들어서 신부와 복사가 들어오든 말든 그냥 눈감고 앉아있다보니 3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잘 잤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남들 일어날 때 저도 처음으로 일어나봤더니 신부와 복사가 퇴장한다고 함께 걸어나오고 있더군요. 재수가 참 좋았죠 ㅎㅎ

 

수녀원 내 수녀 30여명에, 어제는 크리스마스 미사라고 일반인 20명 정도와 인근 아이들 10여명이 참가한 미사는 수녀원 내 조그만 성당을 가득 메울 정도였지만, 그렇다고 그 신성함을 훼손시킬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저만 조느라고 그 거룩한 밤을 방해하였죠.

 

성당은 참으로 좋은 위치에 세워졌습니다. 산 중턱 높은 곳에 있는데다가, 천장이 높고, 양쪽에 문풍지를 붙인 대형 미닫이 문들이 너댓개씩 있어서 맑고 시원한 바람이 콸콸콸 흘러들어오고 있었죠. 다음에 방문하면 사진을 몇 장 찍어서 올려드리죠. 항상 사진기를 차에 넣어다녀도 멋진 장면을 보면 그냥 감탄만하다가 오는 형광등이라...

 

밤 12시 직전이 되자 밖에서 터지는 폭발물의 소리가 달라지더군요. 이전에는 폭음탄이어서 소리는 크지만 빈도가 적었고, 12시 몇 분 전부터는 폭죽이어서 소리는 작지만 빈도가 엄청나게 늘어납니다. 얼른 나가보려고 했더니, 수녀가 잠깐만 앉아있으면 된다고 붙잡아두던데, 저는 수녀도 사기친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앞쪽으로 밀착하여 앉아 영어노래 세 곡 정도, 중국어 노래 한 곡, 스페인어 노래 한 곡 등의 캐롤을 부르는데 기타 반주도 안맞고 화음도 안맞았지만 유쾌하고 신성한 체험이었습니다.

 

캐롤 부르라고 초대한 동네 아이들 10여명 중 머스마 대부분은 정작 캐롤 부를 때에는 불꽃놀이 관람과 미사 후에 손님 식당에서 나눠줄 간식 때문에 이미 다 도망가고 없더군요.

 

저도 도망가는 티를 안내고 슬금슬금 나와서 전망 좋은 곳을 찾아가 폭죽놀이를 관람했습니다. 눈에 들어오는 탈리사이시, 세부시, 막탄시, 만다웨시, 콘솔라시온시 등의 모든 곳에서 폭죽놀이가 한창이었지만, 그다지 장관은 아니었죠.

 

개인들이 쏴 올리다보니 도시의 구석구석 안 쏘아올리는 곳이 없었지만, 높이 올라오는 고급 폭죽은 없고 대부분 발밑에서 터지고 도시 전등불을 배경으로 하다보니, 우리나라처럼 검은 밤하늘을 배경으로 수놓는 그런 환상적인 맛은 없었습니다.

 

피곤해서 스넥을 함께 하자는 수녀의 요청을 정중히 거절하고 집으로 오는데, 온 길거리가 폭죽과 폭음탄 쓰레기로 뒤덮혀 있었습니다. 도로가 좁다보니 불을 붙여 길 위로 던져 놓은 그 위로 운전해야하는 그런 상황이었고요.

 

자기네 집에서 하다가 행여 불이 날까봐 길거리에서 하는 모양인데, 집에 들어와 잠자리에 든 1시 반 너머까지 쿵쾅대는 음악 소리, 폭음탄 소리, 폭죽 소리가 도시를 점령했습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서민들이 13개월차 보너스를 받아 마음껏 돈을 쓰며 가난에 대한 화풀이와 예수의 탄생에 대한 축하를 함께하는 크리스마스 이브는 역시 국가 최대의 명절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날이더군요.

 

잠자리에 누워 곰곰히 생각해봤습니다.

 

나이 들어 참 주책이지, 왜 눈물을 흘렸을까? 하필이면 그걸 한국인 수녀에게 들켜 다른 수녀에게 일러바치게 만들고...

 

오래 살다 보니 별꼴일세... 죽을 때가 됐나?

 

그 답은 꿈속에서 찾았던 것 같은데, 아침에 눈 뜨는 순간부터 들려오는 폭음탄 소리에 그만 다 날아갔습니다.

 

MERRY CHRISTMAST!!!

 

FELIZ NAVID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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