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壬辰年

봄을 기다리며 - 소군원(昭君怨)

호린(JORRIN) 2012. 1. 23. 00:48

 

 

 

 

 

중국에는 양귀비 등 고대로부터 유명한 4대 미인이 있죠. 그 중에 한 명인 왕소군은 너무나 예뻐서 날아가던 기러기가 그 미모에 놀라 날갯짓을 잊었기에 그만 떨어졌다고 하죠. 하여튼 뙤놈들 뻥이란 ㅎㅎㅎ

 

저는 왕소군이 예뻤는지 어쨌는지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만, 그녀를 기렸던 한시[漢詩]는 참 마음에 듭니다. 멀쩡한 병사들은 놔두고 여자를 상납해서 화친을 도모한 황제와 무신들. 시는 그 희생자인 왕소군을 참 애잔하게 그리고 있기 때문이죠. 그녀를 애석하게 생각했던 중국인들의 한시가 몇 편 있는데, 한문에 능통하지 못한 저로서는 사소한 오자나 잘못된 설명 혹은 엉뚱한 해석의 진위 여부를 판가름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 많이 애석합니다.

 

이백과 동방규가 각각 "소군원"이란 제목의 시를 짓고, 다른 몇몇도 왕소군을 대상으로 하는 시를 지었다는데, 인터넷으로 돌아다니는 것을 보면 시인과 시와 내용이 완전 짬뽕입니다. 그래서, 답답하고 애석한거죠.

 

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것은 이 모든 것을 완전 짬뽕한 것으로 보여지는 "당언시"(실제 이름이 아닌 것 같습니다)라는 것입니다. 저로서는 한 개인이 지은 것인지 아니면 여러 시인의 것을 합성한 것인지를 모르겠지만, 어쨌든 제가 제일 좋아하는 내용의 시입니다. 시간의 경과 순으로 기술되어 이해도 잘 되고 감정도 잘 느껴지기 때문이죠.

 

1992년 경, 어느 봄날에 피씨 통신을 통해 처음으로 저 "당언시"를 접하고서는 사무실과 집 벽에 저 시를 붙여놓고 있다가 부서 이동과 이사 등으로 어느 순간 잊어버리고 나니 인터넷에서는 두 번 다시 그 시문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시인들 별로 쪼개진 시들은 보였지만요. 그러다 최근에 다시 검색해 보니 다행히 찾을 수가 있었기에 잽싸게 주워왔습니다.

 

남자들, 특히 무기를 든 남자들은 힘을 자랑하는 경향이 있죠. 한주먹 거리도 안되는 여자 앞에서는 특히 더하고요. 아프리카에 가면 평생 먹고 노는 남자들이 있다고 해요. 여자들만 일하고. 그래서 남자는 뭐하는 사람이냐고 물어보면 '비상 시에 부족을 지킨다'고 한다죠. 지난 번 비상 시가 언제였냐고 물어보니, 대답하는 여자가 자기가 태어나고 아직 비상 시가 단 한 번도 없었다 라고 했다더군요. 한비야 책인지 TV 다큐먼터리인지 헷갈리지만 하여튼 어디선가 본 내용입니다.

 

그런 마초맨들이 막상 자기보다 더 힘쎈 사람이 나타나면 제일 먼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죠. 맞상대해서 모든 것을 잃느니 최고권력자를 받들어 모시며 차상위의 권력이라도 누리고 싶어서죠. 학교에 보면 꼭 주먹 센 놈에게 빌붙어서 위세를 부리는 놈이 있듯이요.

 

漢나라 때라고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허리에 칼을 차고 거들먹거리며 약한 자들 앞에서 위세를 자랑하던 무신들이 막상 흉노족의 거친 모습에는 싸워 볼 엄두도 못내고 전의를 상실해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화친이란 명목으로 흉노에게 조공을 받치는데 거기에 인간 공물 왕소군이 포함되는 거죠.

 

우리나라에서도 날마다 자주국방이니 국방의 의무니를 떠들며 장군의 권한을 최대한 누리던 놈들이 전시작전권은 타국에 위임해야 한다고 주장하듯이, 중국에서도 나라를 지키겠다고 녹을 먹고 거들먹거리던 것들이 막상 그네들이 힘을 발휘해야 할 시점에는 여자의 치마폭 속으로 숨어버리고 만거죠. 마치 남성우월주의에 사로잡혀 살던 놈들이 죽을 때는 어머니를 부르며 죽는 그런 쪽팔리는 순간이 노출된 것입니다.

 

더 웃긴 것은,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왕소군이 떠나기 전에 漢 元帝[한 원제]가 자기도 못 먹어본 미인을 남 주기 아깝다며 3일 밤낮으로 진탕 먹어보고 줬다는 해설입니다. 만약에 이것이 사실이라면, 권력의 대가로 자기가 지켜야 할 것은 못 지켜주면서도 오히려 누릴 것은 다 누리려는 마초맨들의 속성을 볼 수 있죠. 

 

여하튼, 그렇게 빼앗기다시피 상납했기에 왕소군이 더 애절하고 더 아름답게 느껴졌는지도 모르지만, 꼴에 남자의 자존심은 있다고 "昭君怨"이라는, 즉 "왕소군의 원망"이라는 제목의 시도 지어 자기네 여자의 미모가 출중했음을 선전하면서, 마음 속의 미안함도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떤 측면에서는 우리도 많이 반성해야죠. 지켜주지도 못한 여자를 "화냥년"이니 뭐니 해 가면서 오히려 그 잘난 주먹과 발로 패고 짓밟은 역사가 있으니까요. 그렇게 막강한 주먹이 있었으면 오랑캐하고나 싸울 것이지, 억지로 여자를 공물로 바치고 나서는, 돌아온 여자에게 순결을 지키지 못했다고 욕을 해대고 멸시했다는 일부 우리 조상들도 참 싸가지 없고 인간 같잖은 놈들이었어요. 뭐, 지금도 "위안부"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그리 진보되지는 않았죠.

 

 

 

 

하여튼, 그렇게 공물이 되어 흉노족에게 시집 가서 이역만리 머나먼 곳에서 쓸쓸히 죽어간 왕소군을 노래한 여러 편의 시들 중에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당언시를 살펴 보죠.

 

 

 

 

왕소군(王昭君)당언시(詩)

 

 

 

《한도방전성(漢道方全盛)》 한(漢)나라의 도읍은 한창 번성하고 있고 

 

《조정족무신(朝廷足武臣)》 조정에는 싸울 무신 또한 넉넉하거늘 

 

《하수박명첩(何須薄命妾)》 하필이면 팔자 사나운 여자에게

 

신고사화친(辛苦事和親)》 어렵고 힘든 화친을 성사시키는 일을 맡기는가  

 

 

 

《소군불옥안(昭君佛玉鞍)》 왕소군이 구슬 안장을 털고

 

《상마제홍협(上馬啼紅頰)》 말위에 오르니 분홍 빛 두 뺨에 흐르는 눈물

 

《금일한궁인(今日漢宮人)》 오늘은 한(漢)나라의 궁인이더니

 

《명조호지첩(明朝胡地妾)》 내일은 오랑캐의 첩이 되는구나

 

 

 

 

《엄루사단봉(掩淚辭丹鳳)》 눈물을 흘리며 한나라 궁을 하직하고 

 

《념비향백룡(念悲向白龍)》 고개 숙여 슬픔을 삼키며 백룡성으로 향하네 

 

《선우랑경희(單于浪驚喜)》 흉노 왕은 미친 듯이 기뻐하지만

 

《무복구시용(無復舊時容)》 아름다웠던 옛 모습 다시는 볼 수 없어라 

 

 

 

《만리변성원(萬里邊城遠)》 만리 변방의 성은 멀기도 하고

 

《천산행로난(千山行路難)》 수많은 산길은 험하기도 하구나

 

《거두추견일(擧頭推見日)》 머리를 들면 오직 해만 보이니

 

《하처시장안(何處是長安)》 어느 방향에 떠나온 장안이 있는 것인가?

 

 

 

《호지무화초(胡地無花草)》 오랑캐의 땅에는 꽃과 풀이 없으니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이 와도 봄 같지가 않구나 

 

《자연의대완(自然衣帶緩)》 자연스레 허리띠가 축 늘어진 것은 

 

《비족위요신(非足爲腰身)》 가느다란 몸매를 만들기 위함이 아니네 

 

 

왕소군의 허리가 야위어 진 것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지 오랑캐 왕의 이쁨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는 마지막 구절에서 마초맨의 장엄한 기개가 엿보이죠. 비롯 공물이지만 그래도 자신을 왕비로 맞이해 지극 정성으로 사랑해 주는 최고권력자라는 사람에게, 그리고 그 사람과 함께 생산한 자녀들에게 정을 붙이고 살고 있으면 그곳이 고향이지, 자기를 지켜주지 못하고 오히려 공물로 바친 나라가 뭐가 그리 그리워 허리살까지 빠졌을까요? ㅎㅎㅎ

 

시 해석은 제가 예전 기억과 짧은 실력과 여러 사이트의 것을 참조하여 수정했습니다. 맨 아래에 보면 제가 퍼온 원문이 있습니다.

 

 

 

다음은 여러 명의 시인들이 개별적으로 시를 지었다는 주장대로 시를 몇 개 구성해봤습니다. 만약에 개별적인 시가 맞다면 위의 시는 짬뽕인거죠.

 

 

 

 

昭君怨             李  白

 

 

昭君拂玉鞍  上馬涕紅頰 

소군이 옥 안장을 털고 

말에 오르니 붉은 뺨에 눈물이 흐르네

 

今日漢宮人   明朝胡地妾 

오늘 한나라 궁녀가

내일 아침은 오랑캐의 첩이 되는구나

 

 

 

 

昭君怨             東方逵

 

 

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

오랑캐 땅에는 꽃과 풀이 없으니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구나

 

自然衣帶緩   非是爲腰身

자연히 옷 띠가 느슨해지니

이는 허리 몸매 위함이 아니었도다 

 

 

 

 

昭君墓             常  建 

 

 

 

漢宮豈不死   異域傷獨沒

한나라 궁궐에서 어찌 죽지못하여

이역에 홀로 파묻히는 것을 걱정하노라

 

萬里馱黃金   娥眉爲枯骨

만리길에 황금을 실어 보냈지만

고운 모습은 마른 뼈가 되었네

 

廻車夜黜塞   立馬皆不發

밤에 수레를 돌려 변방을 나오려 하지만

말을 세워 떠나지 못하고

 

共恨丹靑人   墳上哭明月

그림 그린이를 원망하며

무덤 위에서 밝은 달을 향해 곡을 하노라

 

 

 

시에 대한 사연과 대략적인 그 시대 상황을 몇 곳에서 퍼왔습니다. 원래 제가 처음 PC통신에서 이 시를 접할 때에는 흉노에게 여인을 상납하여 화친을 도모한 것이 정설이었는데, 며칠 동안 인터넷을 뒤져보니 한시에 대한 오역과 역사에 대해 편향된 해석이 모양만 조금씩 달리하여 블로그나 카페에 올려져 있네요. 즉, 한 사람의 번역과 해석이 조금씩 변형되어 이곳저곳에 올려져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릴 없이 모든 사이트를 다 뒤질 수는 없으니 그냥 몇 개만 참고 삼아 올립니다.

 

 

 

※1. http://chinahistorio.com/bbs/board.php?bo_table=lecture12&wr_id=2461

 

왕소군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한서(漢書)≫「원제기(元帝紀)」와「흉노전(匈奴傳)」, ≪후한서(後漢書)≫「남흉노전(南匈奴傳)」에 보이는데, 그 내용은 600자에 불과할 정도로 지극히 간략하다. 그 후 왕소군에 대한 이야기는 후세 사람들의 입에 끊임없이 오르내리면서, 시가, 소설, 희곡, 민간전설 등의 각종 문학양식을 통해서 그녀의 형상도 끊임없이 재창조되었다. 

 

한(漢) 원제(元帝) 건소(建昭) 원년, 전국에 후궁을 모집한다는 조서가 내렸는데, 전국 각지에서 선발되어 입궁한 궁녀들은 그 수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 이때 왕소군도 18세의 꽃다운 나이에 후궁으로 선발되었다. 

 

황제는 수천 명에 이르는 궁녀들의 신상을 일일이 파악할 수 없었기에, 먼저 화공 모연수(毛延壽)에게 한 사람 한 사람의 초상화를 그려 바치게 했다. 그래서 부귀한 집안의 출신이나 경성(京城)에 후원자가 있는 궁녀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화공에게 자신의 모습을 예쁘게 그려달라고 뇌물을 바쳤으나, 오직 왕소군만은 집안이 빈천하여 아는 사람도 없는 데다 자신의 용모를 황제에게 속일 마음이 없었으므로 뇌물을 바치지 않았다. 결국 모연수는 자기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은 왕소군을 괘씸하게 여기고, 그녀의 용모를 아주 평범하게 그린 다음 얼굴 위에 큰 점을 하나 찍어 버렸다. 

 

그 후 원제는 왕소군의 초상을 보았으나 추하게 그려진 그녀의 모습을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이리하여 왕소군은 입궁한지 5년이 흘러갔지만 여전히 황제의 얼굴도 보지 못한 궁녀 신분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이다.

 

한(漢) 원제(元帝) 경녕(竟寧) 원년(BC 33), 남흉노(南匈奴)의 선우(單于) 호한야(呼韓邪, 재위 BC 58∼ BC 31)가 원제를 알현하기 위해 장안(長安)으로 왔다. 

 

호한야는 모피와 준마 등 많은 공물을 가지고 장안으로 와서 원제에게 매우 공손하게 문안을 올렸다. 이를 크게 기뻐한 원제는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호한야를 환대하자, 호한야는 원제에게 황제의 사위가 될 것을 청하였다.

 

원제는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고는 공주를 시집보내기 전에 먼저 그에게 한나라 황실의 위엄을 한 번 과시하고 싶었다. 그래서 명령을 내려 자기의 후궁 중에서 아직 총애를 받지 못한 미녀들을 불러와 술을 권하게 했던 것이다. 이 일의 중요성을 알아차린 후궁들은 이번이 황제의 주목을 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지라, 제각기 예쁘게 단장하여 황제의 환심을 사고자 하였다.

 

궁녀들이 줄지어 들어오자 호한야는 다채로운 모습에 한참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다, 그 중에서 절색의 미인을 발견하고 시선을 그곳에 고정시켰다. 그리고는 즉시 원제에게 또 다른 제의를 했다.

 

"황제의 사위가 되기를 원하지만 꼭 공주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저 미녀들 중의 한 명이어도 괜찮습니다."

 

원제는 원래 종실의 공주들 중에서 한 명을 택하려고 하였으나, 지금 궁녀들 중에서 한 명을 선발한다면 훨씬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다는 생각에 호한야의 제의를 즉석에서 수락하였다. 이에 원제는 호한야에게 직접 선택하도록 하였고, 호한야는 그 자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왕소군을 지적하였던 것이다. 

 

호한야가 가리키는 손 쪽으로 보니 과연 그곳에는 천하절색의 미녀가 사뿐히 절을 올리는 게 아닌가! 곱고 윤기 있는 머릿결은 광채를 발하고, 살짝 찡그린 두 눈썹엔 원망이 서린 듯, 너무나 아름다운 왕소군의 미모에 원제도 그만 반하고 말았다. 그러나 황제로서 한 번 내린 결정을 다시 번복할 수도 없었다.

 

연회가 끝난 후 원제는 급히 후궁으로 돌아가서 궁녀들의 초상화를 다시 대조해 보았다. 그런데 왕소군의 그림이 본래의 모습과는 천양지차로 다른데다 얼굴에 점까지 그려져 있었던 것이었다. 그 순간 원제는 화공(畵工) 모연수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라 진상을 철저하게 조사토록 명령하였다. 진상이 밝혀지자 모연수는 결국 황제를 기만한 죄로 참수되었다. 

 

그 후 원제는 왕소군을 놓치기 싫은 마음에 그녀를 붙잡으려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하는 수 없이 호한야에게는 혼수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으니 3일만 기다리라고 속이고는 그 3일 동안에 왕소군과 못 이룬 정을 나누고자 하였다. 그리고는 조용히 왕소군을 미앙궁(未央宮)으로 불러 사흘 밤 사흘 낮을 함께 보냈다.

 

3일 후 왕소군은 흉노족 차림으로 단장을 하고 미앙궁에서 원제에게 작별을 고하였으며, 원제는 그녀에게 "소군(昭君)"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왕소군은 마지막으로 장안을 한 번 바라본 다음, 가슴에 비파를 안고 말에 올랐다. 왕소군 일행이 장안의 거리를 지나갈 때는 구경나온 사람들로 거리를 꽉 메웠다. 이렇게 왕소군은 번화한 장안을 떠나 서서히 늙어 가는 흉노 선우 호한야를 따라 황량한 흉노 땅으로 갔던 것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왕소군이 정든 고국산천을 떠나는 슬픈 마음을 달랠 길 없어, 말 위에 앉은 채 비파로 이별곡을 연주하고 있는데, 마침 남쪽으로 날아가던 기러기가 아름다운 비파소리를 듣고 말 위에 앉은 왕소군의 미모를 보느라 날갯짓하는 것도 잊고 있다가 그만 땅에 떨어져 버렸다고 한다.

 

여기에서 왕소군을 일러 "낙안(落雁)"이라고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왕소군이 떠날 때 중원은 따뜻한 봄이었지만 북쪽 변방은 차가운 바람이 불어닥쳤다. 

 

왕소군은 흉노에서 어진 마음으로 그곳 여인들에게 길쌈하는 방법 등을 가르쳤고 한(漢)과의 우호적인 관계 유지에 힘써 그 후 80여 년 동안 흉노와 한과의 접전은 없었다고 한다.

 

왕소군이 죽은 후 그 시신은 대흑하(大黑河) 남쪽 기슭에 묻혔으며, 지금도 그 묘지는 내몽고 후허호트시(呼和浩特市) 남쪽 9km 지점에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가을에 접어든 이후 북방의 초목이 모두 누렇게 시들어도 오직 왕소군 무덤의 풀만은 푸름을 잃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청총(靑 )"이라 하였다고 한다.

 

 

※2. http://ucc.gamemeca.com/ucc/dictionary/view.html?gid=2581&id=2581

 

이름은 장( ·檣 ·牆). 자 소군. 일설에는 소군이 이름이고 장이 자라고도 한다. 남군(南郡)의 양가집 딸로 한나라 원제의 후궁으로 들어갔으나, 황제의 사랑을 받지 못하여 비관하고 있었다. 당시 흉노(匈奴)의 침입에 고민하던 한나라는 그들과의 우호 수단으로 흔히 중국 여자를 보내어 결혼시키고 있었다.

 

BC 33년 왕소군은 원제의 명으로 한나라를 떠나 흉노의 호한야 선우(呼韓邪單于)에게 시집가 연지(閼氏)가 되었고, 아들 하나를 낳았다. 호한야가 죽은 뒤 호한야의 본처의 아들인 복주루 선우(復株累單于)에게 재가하여 두 딸을 낳았다.

 

이러한 소군의 설화는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윤색되고, 흉노와의 화친정책 때문에 희생된 비극적 여주인공으로 전하여 왔으나 대부분은 사실(史實)로 인정할 수 없다.

 

후한(後漢) 때의 《서경잡기(西京雜記)》에 의하면, 대부분의 후궁들이 화공(畵工)에게 뇌물을 바치고 아름다운 초상화를 그리게 하여 황제의 총애를 구하였다. 그러나 왕소군은 뇌물을 바치지 않았기 때문에 얼굴이 추하게 그려졌고, 그 때문에 오랑캐의 아내로 뽑히게 되어 버렸다. 소군이 말을 타고 떠날 즈음에 원제가 보니 절세의 미인이고 태도가 단아하였으므로 크게 후회하였으나 이미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원제는 크게 노하여 소군을 추하게 그린 화공 모연수(毛延壽)를 참형(斬刑)에 처하였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진(晉)나라 때에는 문제(文帝) 사마 소(司馬昭)의 이름과 글자가 같은 것을 피하기 위하여 왕명군(王明君)이라 하였고, 명비(明妃)라고도 불렸다. 그 뒤 그녀의 슬픈 이야기는 중국문학에 허다한 소재를 제공하였다. 《소군사(昭君辭)》《명군탄(明君歎)》이라는 한나라의 악부(樂府)가 가장 오래 된 것이고, 그녀를 소재로 한 희곡으로는 원(元)나라 때의 마치원(馬致遠)이 지은 《파유몽고안한궁추잡극(破幽夢孤 漢宮秋雜劇:漢宮秋)》이 가장 유명하다. 진나라의 석계륜(石季倫)이 지은 《왕명군사병서(王明君辭幷序)》가 있고, 당(唐)나라 이후 이백(李白) ·백거이(白居易) 등 많은 시인들이 그녀를 소재로 시를 읊었다. 또 둔황[敦煌]에서 발굴된 《명비변문(明妃變文)》에 의하여, 당말 오대(五代)경부터 구전문학(口傳文學)의 소재가 되었음이 밝혀졌다

 

 

※3. 현지 기행문 : http://blog.naver.com/leekl9350?Redirect=Log&logNo=150094070221

 

 

 

※4. 관련 사이트 : http://blog.daum.net/solsola-/2583

 

 

 

물고기는 물속으로 가라앉고(沈魚) - 西施 침어 서시

 

기러기는 땅밑으로 떨어지며(落雁) - 昭君 낙안 왕소군

 

달은 구름 뒤로 얼굴을 가리고(閉月)  - 貂嬋 폐월 초선

 

꽃은 스스로 부끄러워 하노라(羞花) - 楊貴妃 수화 양귀비

 

 

  王昭君은 西施, 貂嬋, 楊貴妃와 더불어 중국 4대미인 중 한 사람이다. 그녀는 西漢시대 南郡 자귀 출신으로 이름은 장이고 자가 昭君이다. 자귀는 장강삼협에 속하는 곳으로 전국시기의 유명한 시인 屈原의 고향이기도 하다. 

  

  왕소군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漢書≫「元帝紀」와「匈奴傳」, ≪後漢書≫「南匈奴傳」에 보이는데, 그 내용은 600자에 불과할 정도로 간략하다. 그 후 왕소군에 대한 이야기는 후세 사람들의 입에 끊임없이 오르내리면서, 시가, 소설, 희곡, 민간전설 등의 각종 문학양식을 통해서 그녀의 형상도 끊임없이 재창조되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을 예로 들면, 소설로는 東漢 채옹(蔡邕)의 ≪금조(琴操)≫, 진인(晋人) 갈홍(葛洪)의 ≪서경잡기(西京雜記)≫, 대만 작가 고양(高陽)의 ≪왕소군≫, 희곡으로는 원대의 저명한 극작가 마치원(馬致遠)의 ≪한궁추(漢宮秋)≫, 곽말약(郭沫若)의 역사극 ≪왕소군≫, 조우의 역사극 ≪왕소군≫등이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왕소군의 형상은 더욱 풍부함을 갖출 수 있게 되었으니, 즉 문학속의 왕소군은 역사속의 왕소군보다 훨씬 더 우아하고 아름다운 매력을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漢 元帝 建昭 원년, 전국에 후궁을 모집한다는 조서가 내렸는데, 전국 각지에서 선발되어 입궁한 궁녀들은 그 수가 수천명에 이르렀다. 

 

  이때 왕소군도 18세의 꽃다운 나이에 후궁으로 선발되었다. 황제는 수천명에 이르는 궁녀들의 신상을 일일이 파악할 수 없었기에, 먼저 화공 毛延壽에게 한 사람 한 사람의 초상화를 그려 바치게 했다. 

 

  그래서 부귀한 집안의 출신이나 京城에 후원자가 있는 궁녀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화공에게 자신의 모습을 예쁘게 그려달라고 뇌물을 바쳤으나, 오직 왕소군만은 집안이 빈천하여 아는 사람도 없는 데다 자신의 용모를 황제에게 속일 마음이 없었으므로 뇌물을 바치지 않았다. 

 

  결국 모연수는 자기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은 왕소군을 괘씸하게 여기고, 그녀의 용모를 아주 평범하게 그린 다음 얼굴 위에 큰 점을 하나 찍어 버렸다. 그 후 원제는 왕소군의 초상을 보았으나 추하게 그려진 그녀의 모습을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이리하여 왕소군은 입궁한지 5년이 흘러갔지만 여전히 황제의 얼굴도 보지 못한 궁녀 신분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이다. 

 

   왕소군은 궁중의 잡다한 일을 맡으면서도, 많이 남는 시간을 이용하여 독서와 서예, 歌舞, 그림 등을 익히면서 항상 내실을 다지고 자신을 가꾸는 일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그러나 밤이 되면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쓸쓸한 방에서 홀로 고독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꽃다운 나이를 이렇게 흘려보내고 나면, 언제나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을지, 언제나 부모님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다시 낙엽이 지고 풀벌레 슬피우는 가을이 찾아와 차가운 빗줄기가 창문을 두드리면 그녀의 마음 속에는 한없는 그리움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그때마다 그녀는 비파를 타면서 향수를 달래곤 하였다. 유명한 <五更哀怨曲>에는 바로 그녀의 이러한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왕소군이 이렇게 쓸쓸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마침내 그녀의 운명을 결정짓는 날이 찾아왔다. 漢 元帝 竟寧 원년(BC 33), 南匈奴의 선우(單于) 호한야(呼韓邪:재위 BC58~ BC31)가 원제를 알현하기 위해 장안으로 왔던 것이다. 

 

  당시 흉노에는 내란이 발생하여 호한야의 형 질지골도가 북흉노를 세워 남흉노를 위협하고 있었다. 이때 한나라의 西域都護 甘延壽가 북흉노를 정벌하고 질지골도를 죽이자, 호한야는 황급히 원제에게 글을 올려 알현을 청하고 신하의 예를 갖추었다. 

 

  호한야는 모피와 준마 등 많은 공물을 가지고 장안으로 와서 원제에게 매우 공손하게 문안을 올렸다. 이를 크게 기뻐한 원제는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호한야를 환대하자, 호한야는 원제에게 황제의 사위가 될 것을 청하였다. 

 

  원제는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고는 공주를 시집보내기 전에 먼저 그에게 한나라 황실의 위엄을 한 번 과시하고 싶었다. 그래서 명령을 내려 자기의 후궁 중에서 아직 총애를 받지 못한 미녀들을 불러와 술을 권하게 했던 것이다. 

 

  이 일의 중요성을 알아차린 후궁들은 이번이 황제의 주목을 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지라, 제각기 예쁘게 단장하여 황제의 환심을 사고자 하였다. 궁녀들이 줄지어 들어오자 호한야는 다채로운 모습에 한참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다 그 중에서 절색의 미인을 발견하고 시선을 그곳에 고정시켰다. 

 

  그리고는 즉시 원제에게 또다른 제의를 했다. "황제의 사위가 되기를 원하지만 꼭 공주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저 미녀들 중의 한 명이어도 괜찮습니다." 원제는 원래 종실의 공주들 중에서 한 명을 택하려고 하였으나, 지금 궁녀들 중에서 한 명을 선발한다면 훨씬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다는 생각에 호한야의 제의를 즉석에서 수락하였다. 

 

  이에 원제는 호한야에게 직접 선택하도록 하였고 호한야는 그 자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왕소군을 지적하였던 것이다. 호한야가 가리키는 손 쪽으로 보니 과연 그곳에는 천하절색의 미녀가 사뿐히 절을 올리는 게 아닌가! 곱고 윤기 있는 머리결은 광채를 발하고, 살짝 찡그린 두 눈썹엔 원망이 서린 듯, 너무나 아름다운 왕소군의 미모에 원제도 그만 반하고 말았다. 

 

  그러나 황제로서 한 번 내린 결정을 다시 번복할 수도 없었다. 연회가 끝난 후 원제는 급히 후궁으로 돌아가서 궁녀들의 초상화를 다시 대조해 보았다. 그런데 왕소군의 그림이 본래의 모습과는 천양지차로 다른데다 얼굴에 점까지 그려져 있었던 것이었다. 

 

  그 순간 원제는 畵工 모연수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라 진상을 철저하게 조사토록 명령하였다. 진상이 밝혀지자 모연수는 결국 황제를 기만한 죄로 참수되었다. 그 후 원제는 왕소군을 놓치기 싫은 마음에 그녀를 붙잡으려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하는 수 없이 호한야에게는 혼수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으니 3일만 기다리라고 속이고는 그 3일 동안에 왕소군과 못이룬 정을 나누고자 하였다. 그리고는 조용히 왕소군을 未央宮으로 불러 사흘밤 사흘낮을 함께 보냈다. 

 

  3일 후 왕소군은 흉노족 차림으로 단장을 하고 미앙궁에서 원제에게 작별을 고하였으며, 원제는 그녀에게 "昭君"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소군"에는 "한나라 왕실을 빛내고" "황제를 대신하여 흉노를 빛내라"는 의미가 깃들어 있다.

 

   왕소군은 마지막으로 장안을 한 번 바라본 다음, 가슴에 비파를 안고 말에 올랐다. 왕소군 일행이 장안의 거리를 지나갈 때는 구경나온 사람들로 거리를 꽉 메웠다. 이렇게 왕소군은 번화한 장안을 떠나 서서히 늙어가는 흉노 선우 호한야를 따라 황량한 흉노 땅으로 갔던 것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왕소군이 정든 고국산천을 떠나는 슬픈 마음을 달랠길 없어 말위에 앉은 채 비파로 이별곡을 연주하고 있는데 마침 남쪽으로 날아가던 기러기가 아름다운 비파소리를 듣고 말위에 앉은 왕소군의 미모를 보느라 날개짓 하는 것도 잊고 있다가 그만 땅에 떨어져 버렸다고 한다. 

 

  여기에서 왕소군을 일러 "낙안(落雁)"이라고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왕소군이 떠날 때 중원은 따뜻한 봄이었지만 북쪽 변방은 차가운 바람이 불어닥쳤다. 왕소군은 결국 긴 여로에 시달려 병이 나고 말았다. 며칠을 쉬면서 요양을 한 후 안문관 (雁門關)을 나서자 흉노의 여러 장수들이 마중을 나왔다. 

 

  그러나 그곳에 보이는 건 평평한 사막과 부옇게 날리는 먼지, 그리고 끝없이 펼쳐진 초원 위로 뛰노는 소와 양떼들 뿐이었다. 흉노의 왕부에 도착한 호한야는 대단히 기뻐하면서 천막마다 등롱을 달고 아름답게 장식을 하여 왕소군과 혼례를 치렀다. 

 

  그리고는 "흉노족에게 안녕과 평화를 가져주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왕소군을 "영호알씨(寧胡閼氏)"에 봉하고,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그러나 슬픈 피리소리, 달리는 준마, 비릿한 음식, 이역의 풍경 등은 왕소군에게 고국의 그리움만 더해 줄 뿐이었다. 

 

  왕소군이 흉노의 왕부에 도착한 지 3개월 후, 한 원제는 왕소군에 대한 그리움을 못잊어 신음하다가 그만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2년후 즉 한 成帝 建始 원년, 왕소군은 호한야의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이도지아사(伊屠智牙師)라 하였다. 

 

  이도지아사는 후에 일축왕(日逐王)이 되었다. 다시 1년이 지난 후 노쇠해진 호한야가 세상을 떠났으니 이때 왕소군의 나이 불과 24세였다. 이미 3년간 흉노땅에서 생활한 왕소군은 점점 흉노의 생활에 익숙해졌다. 

 

  대알씨(大閼氏)의 장자 복주루(復株累)가 선우의 직위를 계승하자, 흉노의 예법에 따라 왕소군은 복주루의 아내가 되었다. 젊은 선우 복주루는 왕소군을 더욱 아끼고 사랑하여 부부간의 금슬이 매우 좋았다. 왕소군은 두 명의 딸을 더 낳았다. 

 

  장녀의 이름은 雲이고, 차녀의 이름은 當인데, 후에 이들은 모두 흉노의 귀족에게 시집갔다. 한 成帝 鴻嘉 원년, 복주루는 왕소군과 11년의 부부생활을 마치고 세상을 떠났다. 이때 왕소군의 나이 35세였다. 왕소군의 형제는 侯爵에 봉해졌으며, 그 후 여러 차례 칙명을 받들어 흉노의 사신으로 가서 왕소군을 만났다. 

 

  왕소군의 두 딸도 장안으로 와서 입궐하여 太皇太后를 모신 적이 있다. 이 태황태후는 바로 원제의 황후였다. 태황태후에게는 왕망(王莽) 이라는 조카가 있었는데 후에 왕망은 서한 정권을 찬탈하고 "新"나라를 세웠다. 

 

  이에 흉노의 선우는 劉氏의 후손이 아닌 왕망을 중국의 황제로 인정하지 않고 다시 중국 변방을 자주 침범함으로써 전란이 끊이지 않게 되었다. 자신의 노력으로 성립된 화친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상황을 목도하면서 왕소군은 한없는 원망과 절망속에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였다. 

 

  왕소군이 죽은 후 그 시신은 大黑河 남쪽 기슭에 묻혔으며, 지금도 그 묘지는 내몽고 후허호트시(呼和浩特市) 남쪽 9km 지점에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가을에 접어든 이후 북방의 초목이 모두 누렇게 시들어도 오직 왕소군 무덤의 풀만은 푸르름을 잃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靑家"라 하였다고 한다. 

 

  역사에서는 왕소군을 "明妃"라고도 칭하는데, 그 이유는 西晋 시기에 司馬昭의 휘를 피하여 "昭君"을 "明君"으로 개칭했다가 후에 점점 "명비"라고 칭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왕소군의 아들 축일왕 계열은 그 세력이 점점 강성해진 후 東漢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두헌(竇憲)의 추격을 피하여 모두 서쪽으로 달아났다. 그들은 계속하여 총령(蔥嶺)을 넘어 유럽으로 들어가 고딕인(Gothic)을 점령하고 그것을 토대로 로마제국의 붕괴를 야기시켰다. 그리하여 유럽대륙에 강대한 흉노 제국을 건설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후세의 헝가리와 세르비아 등이 되었다. 

 
 
※5http://cafe.daum.net/chinesebible/SZn/234?doc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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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소군(王昭君)의 당언시(詩)

 

 

한(漢)나라 황도(皇道)는 바야흐로 전성(全盛)하고 《한도방전성(漢道方全盛)》

 

조정에는 무신 또한 넉넉하거늘 《조정족무신(朝廷足武臣)》

 

하필이면 미인박명이라더니 신첩으로 흉노섬기는 고통을 치루게 하나 《하수박명첩신고사화친(何須薄命妾辛苦事和親)》

 

소군, 구슬 안장 손질하고 말에 오르니《소군불옥안상마(昭君佛玉鞍上馬)》

 

분홍빛 두 뺨에 흐르는 눈물은《제홍협(啼紅頰)》

 

오늘은 한나라 궁인, 내일은 흉노의 첩됨을 슬퍼함인가?《금일한궁인명조호지첩(今日漢宮人明朝胡地妾)》

 

 

소군 드디어 한나라 궁을 하직하고 《엄루사단봉(掩淚辭丹鳳)》

 

흉노의 사자 따라나서니 《념비향백룡(念悲向白龍)》

 

흉노왕은 미친 듯이 기뻐하려니와《단우랑경희(單于浪驚喜)》

 

소군의 옛 모습 다시 볼 수 없어라 《무복구시용(無復舊時容)》

 

 

만리변성 길도 험하고《만리변성로난(萬里邊城路難)》

 

천산행로 산세 또한 험하구나 《천산행로난(千山行路難)》

 

머리들어 해를 보노매라 《거두추견일(擧頭推見日)》

 

떠나온 장안은 어느 하늘 아래더뇨《하처시장안(何處是長安)》

 

 

호지엔 꽃도 없고 봄이 와도 봄 같지 않네 《호지무화초춘래불사춘(胡地無花草春來不似春)》

 

어느새 시름으로 수척한 허리는 흉노왕의 사랑을 위해서가 아니로세 《자연의대완 , 비족위요신(自然衣帶緩, 非足爲腰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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