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7. 1. 일본이 우리나라에 대한 수출규제조치를 발표하자 일부 언론, 정치인, 유튜버들이 기사와 발언을 통하여 “문죄인 탓에 나라가 거덜나게 생겼다”라고 선동하였고, 인터넷에는 그 선동에 대한 호의적인 댓글이 난무하였다. 그렇지만 아직까지는 “문재앙을 체포해서 일본에 갖다 바치고 항복하자”라는 주장이 나오지 않으니 천만다행이라고나 할까?
오늘은 일요일, 심심하기도 하니 기해왜란에 대하여 도대체 그 원인이 뭔지, 그 대책이나 그로 인해 영향 받을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한번 훑어보고자 한다.
기해왜란의 원인
무슨 일이든지 그렇지만, 어떤 현상의 원인을 파고들자면 한이 없다. 빅뱅까지 올라가야 간신히 그 탓을 떠넘길 대상이 사라진다. 기해왜란도 마찬가지다. 조선의 선조나 그 후대의 왕들은 두 번에 걸친 왜란의 교훈을 왜 그토록 쉽게 망각했던가? 세종대왕은 왜 앞선 과학으로 무기를 개발하여 왜국을 식민지로 만들지 않았던가? 등등 그 탓의 대상을 억지로 거슬러 올라가자면 끝이 없다.
그래서, 나는 일제시대에 학교 선생으로 사회 생활을 시작한 한 식민지 백성의 이야기로 그 원인 분석의 첫 걸음을 시작하고자 한다. 그는 본국민에게서 무시 받는 식민지 백성이었지만, 안정적인 월급쟁이 생활보다는 교장에게서 무시 받는 말단 교사 생활이 무엇보다도 싫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는 “일본의 개와 말”이 되겠다는 신념으로 본국의 육군 장교가 되어 대한 독립군 토벌에 나섰다. 그리고 해방 이후에는 똑같은 매국 경력자들의 도움을 받아 대한민국 국군 장교가 되었지만, 이번에는 빨갱이 활동을 해서 목숨이 날아갈 지경에 이르렀는데, 이 또한 만주군관학교 출신들의 도움으로 계급 강등과 강제 전역의 처분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일본에게 좋은 것은 그에게도 좋은 일이었고, 한국전쟁이 일본에 막대한 부를 안겨주었듯이, 그에게도 군인으로 복귀할 기회를 제공하였기에, 그는 전투와는 상관없는 정보국 장교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이후에 그는 쿠데타를 일으켜 나라의 정권을 잡게 되는데, 미국은 그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으므로 정통성이 있는 대표자로 인정하지 않았고, 이에 그는 미국 황제를 알현하고자 무던히 노력하여 미국 황제를 만날 전제 조건을 제시했는데, 그는 1963년 정권 이양과 베트남 파병을 제의하며 미국의 무상 원조 지속과 정권에 대한 정통성을 확인 받고자 하였으나 별 실속이 없었다.
그러자 1961년에 그는 나라의 경제권을 장악하고자 독자적으로 화폐개혁을 단행하였는데, 이에 화가 난 미제국주의의 황제는 무상원조 취소를 무기로 그를 흔들어대었고, 결국 그는 케네디에게 무조건 항복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황제는 그에게 몇 가지 이행조건을 내걸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미국대통령이 보내는 경제고문단의 자문을 받아 수출주도경제 확립, 일본과의 국교정상화, 베트남 파병, 조기 정권이양 등이었다.
그래서 원래 계획했던 것보다 1년 정도 앞당긴 1962년에 형식적인 조기 민정화를 단행한 그는 대통령으로서의 화려한 경력을 시작한다. 그리고 알려진 그대로의 굴욕적인 한일국교정상화를 진행하였다. 왜놈의 앞잽이로 독립군 토벌을 하던 놈이었으니 주군을 상대로 독립군 피해보상금을 받을 생각 따위야 진작에 없었을 것이고, 독도가 미래에 영토 문제가 될지도 모르니 화약으로 폭파하여 물밑으로 가라앉히자라는 제안을 할 정도였으니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미래를 내다보고 행한 협상도 아니었다. 그저 불법 정권에 대한 미국의 보장을 얻기 위해서 자신이 아닌 젊은이들의 목숨을 베트남 전쟁터로 집어던졌듯이, 일본에 나라를 팔아넘기는 협상 또한 졸속으로 진행하였기에 국민의 반대도 극심하였다.
보수란 작자들은 박정희가 일본에게서 받은 보상금을 헛되이 쓰지 않고 경제개발에만 사용하였다고 칭송하지만, 그것은 천만의 말씀이자 만만의 콩떡이다. 우선, 일본의 기업들이 기득권을 확보하기 위해 한번에 몇 천만 엔씩 정치자금을 모아서 박정희에게 제공하였는데, 그 정치자금이 너무나 컸기에 보상금은 쳐다볼 필요도 없었다. 둘째로 미국 대통령이 파견한 경제고문단의 감시가 있었기에 경제는 박정희가 어떻게 해볼 수 있는 분야가 아니었다. 그냥 그네들이 짜주는 경제개발계획을 읽어주고 생색만 내는 수준이었다. 그러다 보니 일본에서의 보상금은 물품과 용역의 형태로 3억불이 무사히 들어오게 되었는데, 그게 대부분 기계부품이나 원자재의 형태로 들어왔다. 따라서, 이때부터 우리나라 경제는 일본에 종족적이게 되었다. 일단 준공된 공장의 모든 기자재의 수리나 확장에는 동일한 부품이나 기계가 유리했기에 일본제품을 사용하지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에 일본과 사이가 틀어질 때마다 “반일”이니 “지일”이니 외치다가 “극일”까지 떠들어댔어도 과거의 정권에서 변하지 않은 것이 한 가지 있다.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한일국교정상화”가 어떤 조건으로 이뤄졌는지를 공개하지 않은 것이다. 박정희부터 전두환이나 노태우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김영삼이나 김대중시절에도 그 합의문은 공개되지 않았고, 겨우 참여정부가 들어서고 나서야 그 내용이 공개되었다. 그래서 그때부터나마 겨우 정신대나 강제징용자들이 일본에 손해배상을 청구할 자격이 있다는 법률적 해석이 가능했지만, 이미 대부분의 피해자는 사망하고 난 이후였다.
아마 “화냥년”이란 말의 유래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백성들을 착취하여 호의호식하던 조선의 무능한 지배계층은 병자호란을 당하자 제 살길만 모색하기에 바빴고, 결국 빠져나갈 방법으로 무고한 아녀자들을 사냥하여 청나라에 50만명이나 전리품으로 바쳤는데, 훗날 청나라에서 이들이 나이가 들어 노동력이 없다고 돌려보내자 청나라놈들에게 몸을 대주고 왔다는 의미에서 그 여자들을 “환향녀(還鄕女)라고 불렀다고 한다. 평상시에는 여자를 노예처럼 부려먹고 주먹질이나 하다가 외부의 적 앞에서는 지켜주지도 못한 놈들이 그 아픔을 쓰다듬어주지는 못할 망정 오히려 “화냥년”이라고 부르며 왜 당하고 왔냐며 또다시 줘팼다고하니 아무리 우리 조상이라고 하더라도 욕을 안하고 넘어갈 수가 없다.
위안부문제나 강제징용자들의 문제에서도 마찬가지다. 경제를 외치는 자들은 말한다, “경제 안전을 위하여 과거사는 잊어버리자”.
박정희나 전두환시절에 우리는 비슷한 일들을 겪었다. 이웃집 누군가가 이유도 없이 끌려가고, 병신이 되어 돌아오거나 죽어서도 돌아오지 못하거나, 그러거나 말거나 형사란 놈들은 옆집을 돌아다니며 저 집에 무슨 일이 있으면 이 번호로 연락을 해달라고, 저 집 남자의 5촌이 간첩이라고…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말했다. 저 집 아이와 어울리지 말라고…
그리고 훗날 그들은 말한다. 누가 죽든 말든, 억울하든 말든 내 입에 밥 한 숟가락 더 들어오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그네들의 논리는 단순하다. 박정희 덕에 경제가 좋아졌고, 전두환 시절에는 그보다 훨씬 더 좋아졌다고. 정권의 안정과 나라의 경제를 위해서는 누군가가 간첩조작사건으로 희생되는 것이 필요악이었다고. 그렇지만 그 누군가를 하필이면 내 아이들이라고 가정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고.
이제 그들은 또 외친다, 일본이 등 돌리면 우리 입에 들어오던 밥이 한 숟가락 줄어들지 모른다고. 위안부고 강제징용자고간에 그냥 좋게좋게 넘어가자고.
정권을 틀어쥔 자들과 거기에 빌붙어서 이득을 누려온 자들이 아무런 판단도 없이 정권의 주장을 받아들인 대다수 국민들의 뒷받침에 힘입어 가장 힘없는 국민들의 상처를 강제로 덮고서 그 대가로 정권을 유지해온 것이 바로 기해왜란의 원인이다.
앞으로의 전개
솔직히 1960 ~ 80년대에는 우리나라에 들을만한 노래가 없었다. 우리나라 노래는 군사정권의 검열을 통과해야 했기에 “아침이슬”이나 “상록수” 같은 노래 말고도 무수한 노래가 제재의 대상이었다. 외국 노래도 별 희안한 이유를 들어서 금지곡 목록에 올렸다. Queen의 “Bohemian Rhapsody”도 “자살을 선동한다”는 이유로 금지곡에 올려졌다. 그러나, 외국곡 특히 미국의 팝송은 대부분 무사통과였기에 그 시절에는 팝송이나 흘러간 노래가 주된 노래였다.
그러다가 ‘문민정부’를 거쳐서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면서 사상의 자유가 대폭 확대되자 창작의 자유가 그 꽃을 피우게 되었다. “공동경비구역 JSA”와 “쉬리”처럼 이전에는 발상만으로도 교화형에 처해졌어야 할 내용이 영화로 만들어졌고, ‘조관우’의 “늪”과 같이 불륜스러운 곡도 방송을 탈 수 있게 되었다. 그 이후의 진행과정은 구태여 말로 하지 않아도 다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방탄소년단”을 위시한 K-POP과 “대장금”, “도깨비”, “태양의 후예” 등과 같은 K-Drama는 지금 세계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자동차, 가전, 패션에서도 우리의 창의적인 디자인이 세계를 누비고 있고, 인터넷 게임에서도 우리나라 두뇌가 독보적인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
독재 치하에서도 이처럼 자유로운 창작활동과 자유로운 경제활동이 가능했을까? 역사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란 자들은 말한다 “박정희의 독재가 나라를 살렸다”.
그러나 그가 살린 것은 그와 그 주변 똘마니들의 목숨이고, 그가 불린 것은 그들의 호주머니지 국고가 아니다!
독재 치하에서보다는 창의력과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에서 더 높은 성장을 보였다는 것은 지구 상의 모든 나라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보수란 자들은 또 말한다, “기해왜란은 일본에 기대어 살아온 우리나라 경제에 치명적인 사건이다. 문재인이 얼른 무릎 꿇고 사죄해서 원상복구가 되도록 해야한다”.
보수란 꼴통들은 일본이 아무리 바보 같은 판단으로 이 일을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문재인이 사과하면 그들이 지금 와서 돌이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보다. 설령 그들이 기해왜란을 일으킬 때에는 몰랐다고 하더라도, 이제는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그들도 안다. 이미 우리나라에서는 탈일본의 시동이 걸렸고, 이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중단시킬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한일 최고의사결정권자들이 만나서 지금 당장 예전 관계로 되돌리자고 합의한다고 해서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가 또다시 일본 불산만 사용할까? 우리나라 업체들이 일제 원자재라는 개목걸이에 또다시 목을 들이밀까? 일본 기계 설치를 전제로 공장을 설계할까?
아베가 기해왜란을 일으킬 때만 하더라도 이런 사실을 몰랐을 수도 있겠지만, 이미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더 잘 이해하게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나라로서는 어쩔 수 없이 맞이한 기술 해방의 길이고, 일본은 오기로라도 갈 수 밖에 없는 이별의 길이다.
기술의 격차
소재와 기계 분야에서 우리나라와 일본과의 격차가 너무나 커서 그 간격을 뛰어넘기가 너무나 힘들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돈이면 처녀 불알도 산다”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그렇다, 사는 사람에게 돈만 있다면 못 살 물건이 없다. 심지어 원자폭탄도 살 수 있을 것이다. 일본에서 수출하지 않겠다고 하면, 다른 나라나 국내 제조업체의 물품을 구매하면 될 일이다.
국제 분업이 활성화되어 있는 지금의 세계 경제상황에서 우리가 일본에서 소재와 기계를 들여오는 이유는 간단하다. 우선, 소재는 규모의 경제와 JIT(Just In Time, 적기공급생산방식) 때문이다. 반도체나 반도체를 이용하는 전자기기의 경우에 우리나라, 일본, 중국, 대만에서 소재, 반제품, 완제품이 이동하는 국제 분업 상황에서 미국이나 유럽에서 시간과 비용을 낭비하며 수입하기도 그렇고, 불산처럼 매출액이 얼마 되지도 않으면서도 환경오염의 우려가 큰 것을 자체 생산하기도 그렇기 때문에 이웃나라에 일정 부분을 서로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산업화를 일본의 기계로 시작하였고,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래서 기계의 대일 의존도가 조금 높은 편이지만, 조그만 시장임에도 불구하고 자체 개발도 많이 진행하였다. 대단한 사람들이다. 그렇지만 첨단이라고 할 수 있는 반도체 전(前)공정은 기술력이 뛰어난 외산 기계에 많이 의존한다고 하는데, 기해왜란이 이런 부분도 많이 개선시켜줄 것으로 기대한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SK하이닉스가 가칭 ‘256’제품을 만드는 반도체공장을 신설하려고 사업계획을 수립하고 있는데, 전(前)공정에 들어가는 기계들 중 하나를 제작하는 업체가 우리나라에 한 업체, 일본에 한 업체가 있고, 두 업체의 기술력은 동등하다고 가정해 보자. 두 업체에 발주의향서를 보내어 견적서를 받아본 담당자는 당연히 고민을 하게 될 것이다. 금액이냐 안전이냐. 윗사람에게 깨어질 각오로 모험을 하느냐 아니면 현장부서에서 요구하는 업체에 비싼 금액으로 발주하느냐. 그런데 일본 업체는 아주 조그만 금액일지언정 다른 회사에 납품한 실적도 있다고 되어있다. 정확한 내용은 몰라도 일단 그 점에서 안정감을 준다. 그래서 담당자는 일본 업체를 선택하였다.
여기까지가 가정이었다고 하면, 그 이후는 다음과 같은 현실이 된다.
세상에 완벽한 제품은 없다. 일본 업체가 제조한 기계의 잘못이든, 전후 공정의 잘못이든, 사용자의 잘못이든, 일본 업체는 납품을 시작한 날부터 하이닉스 공장을 수시로 들락거린다. 하이닉스의 비용으로 하이닉스 직원과 협동하며 많은 문제점들을 개선한다. 그리고 그런 활동은 자료로 남게 된다. AI(인공지능)란 것이 바로 이런 자료를 어마어마하게 모아서 활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 업체는 기존 제품의 결점도 보완하고, 하이닉스의 차기 생산라인(512)에 필요한 차기 제품의 사양도 대충 감을 잡을 수 있게 된다. 즉, 현장감이 살아있게 되었다.
256용 제품 납품에 실패한 한국 업체는 어떻게 되었을까? 자체적으로 256 제조기계를 분석하고 개선하고, 512 제조기계를 상상해야만 한다. 하이닉스의 공장에 기계가 어떻게 놓여있고, 어떤 조건에서 작동하는지도 그냥 관념만으로 상상할 수 밖에 없지만, 더 어려운 것은 그 모든 활동을 수입도 없이 자체 비용만으로 진행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국산화가 왜 어려운 것인지를 잘 알려준다.
달리 말하자면, 이것이 왜 기해왜란이 일본 업체에게 치명적인지를 잘 설명한다. 이제부터 일본 업체들은 자기 비용으로 자기네 머리 속에서 차기 제품을 구상해야 하고, 개선해야 하고, 시험해야 하지만 판로가 없고, 한국의 국산화 업체는 현실감 있게 활동할 수 있다.
이제까지 한국의 소재업체는 국산화한 소재를 들고 가서 하이닉스 담당자에게 테스트라도 한번 해달라고 읍소해야만 했지만, 하이닉스의 담당자는 겨우 몇 십억 원의 비용 절약을 위해서 몇 십조 원 어치를 만들어내는 생산공정을 위험에 노출시킬 생각이 전혀 없었다. 특성이 조금씩 다른 다양한 소재들 중에서 한번 안정성을 드러낸 소재를 바꿀 필요가 없었다. 이 소재와 저 소재의 특성이 조금씩 달라도 소비자에게는 아무런 차이가 없을테지만, 검증된 소재냐 아니냐 하는 것이 생산을 책임지고 있는 담당자에게는 아주 큰 차이다. 기해왜란은 안정성을 추구하는 생산담당자에게 자재 국산화를 추구할 의무 혹은 다수의 공급자를 물색할 의무를 부여하였다.
마치며…
과거에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고 해서 이제 와서 그 손가락을 찾아내어 잘라내거나 벌 주자고 한다면 그처럼 어리석은 짓이 없을 것이다. 내가 그 손가락의 잘못과 처벌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나와 그 손가락이 서로 다른, 분리된 존재라고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다. 우리는 어찌되었거나 결국 하나다. 우리 인류의 역사는 이웃이, 마을이, 지방이, 국가가, 모든 인류가 하나임을 체험하는 쪽으로 발전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다"는 그냥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현실로 인식되어가고 있다.
그런데, 과거에 어느 손가락이 무심결에 원자폭탄의 발사 스위치를 잘못 눌렀던 사고가 있었다고 해보자. 과거를 되돌아보고 재발방지책을 만들어내는 것이 잘못된 것일까? 그 잘못의 원인과 과정과 결과를 훑어보고, 그러고 나서 다친 부위를 어루만지고, 실수한 손가락의 격려하되 재발방지책을 숙지시키는 것이 전체에게, 또는 각 부분에게 해가 되는 행위일까?
731부대, 정신대, 강제노동이나 강제동원 등 일제가 저지른 만행은 반드시 널리 알려져야만 한다. 그것이 인류와 일본과 우리나라의 미래를 안전하게 만드는 방법이고, 인류의 보편적인 행복추구권을 행사하는 방법이다. 1965년의 한일기본조약처럼 외세의 강압에 의해 얼떨결에 봉합된 상처는 영원히 낫지 않는 법이다. 이제라도 상처를 뜯어서 제대로 봉합해야 한다. 일본은 제대로 된 사과를 하고, 이를 후세에 교육시키고, 재발방지책을 실천해야만 한다.
일본이 경제적으로 어렵다면, 우리나라의 경제가 커졌기에 금전적인 부분은 어느 정도 양보할 수 있다고 본다. 정부와 포스코에서 기금을 마련하고, 이를 일본 정부나 기업체의 기금에 합해서 정신대나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배상금으로 지급하여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전제조건이 있다. 일본이 제대로 된 사과를 해야만 한다는 것이고, 재발방지책을 실행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사과하지 않는 상대방을 용서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대가 제대로 된 사과를 할 마음을 갖게 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국산화의 길과 수입선 다변화의 길을 걸어갈 수 밖에 없다. 기해왜란은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일본에게 역사를 제대로 바라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질 기회를 제공하는 사건이 되었고, 우리로서는 두 번 다시 아픈 역사를 만들지 않게끔 스스로 일어날 기회를 스스로 찾는 사건이 되었다.
태평양전쟁 이후의 한반도 분단과정에서 보았듯이, 우리나라 IMF사태에서 보았듯이, 미국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행동하는 집단일 뿐 아직까지는 인류애라든지 혹은 “우리는 하나다”를 실천하는 집단이 아니다. 우리가 충분히 일어서기 전에는 일본과 타협하지도 말고, 미국의 중재도 바라지도 말자.
그냥 무소의 뿔처럼 걸어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