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이야기

조직에서 남성 상사와 여성 직원의 관계

호린(JORRIN) 2020. 7. 16. 22:24

젊어서 한창 열심히 회사 생활을 할 때 일어났던 일입니다.

 

제가 근무하던 시절에는 부서마다 여직원이 두어명 있었고, 여러 명의 남자 직원들이 비교적 한가해 보이는 여직원에게 타이핑이나 출력 등 이런 저런 업무를 부탁하여 일을 나누곤 하였는데, 저는 가는 부서마다 항상 여직원 한 명을 데리고 일을 했고, 그 여직원들은 전적으로 제가 지시하는 업무만 수행했습니다. 보통 한 여직원과 2 ~ 3년 정도 함께 근무했고, 그러다 보니 저는 제 여직원들의 하루 일정에 대해서 언제나 파악하고 있었고, 여직원들은 언제나 제가 어떤 기분인지를 살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여직원들은 저와 함께 있으면 업무 이야기도 하지만, 사적인 애로사항도 이야기하고, 다른 남자직원들에게 이야기하기 힘든 회사내 여직원들 사이에 일어난 일이나 여직원들과 관련해서 개선해야 할 사항도 제게 전달하였기에, 저도 제 여직원이 사적인 업무를 볼 수 있는 시간을 배려해주기도 하고, 저녁에 윗사람들과 술자리를 가질 때 여직원들 사이에서 일어난 일을 거론하여 제도 개선도 도모하고는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제게 야간 연장근무와 휴일 근무가 워낙에 많았기 때문에, 부서내 회식과는 별도로 저와 함께 일하는 여직원과 둘이서 저녁을 먹어야 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 모습이 다른 직원들에게 많이 목격되곤 했습니다. 또, 경우에 따라서는 휴일에 벌어지는 저의 회사내 친목모임에 제 여직원이 저도 몰래 나타날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저로서는 참 난처하고, 다른 직원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보이기도 하였죠.

 

어느 날은 제가 그 당시에 저와 함께 근무하고 있던 여직원에게 이런 말도 했습니다.

"나는 내 마누라가 누구인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매일 야근 아니면 술자리 때문에 밤 12시 전후로 집에 들어가고, 새벽에 일어나서 씻고 옷입고 나오다보면 집사람하고 말 한 마디도 나누지 않는 날이 많은데, 너랑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경우에 따라서는 밤늦게까지, 앞뒤로 앉아서, 마주 보면서 온갖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잠자리를 같이하는 집사람보다 너가 더 가까운 사이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당연히 여직원도 그 말에 동의했습니다.

 

그리고, 서로 근무하면서 업무적인 대화를 하다가도 가벼운 농담이라도 하면서 서로 히히닥 거리기라도 할라치면 그냥 느낄 수 있는 것이 있어요, 여직원의 눈빛에 사랑이 담겨져 있다는 것을.

 

그 당시에 저는 바람을 피워보질 못했습니다. 이제 막 컴퓨터 시대로 넘어가는 시절이어서, 아직 전산화가 완성되어있지 않았고, 종이 서류로 검토하고 기안하고 결과 보고하는 것이 대부분이었기에 워낙에 바쁘게 살다보니까, 마음에 드는 누군가를 발견할 틈도 없지만, 그 여자를 꼬시기 위해서 시간 내어서 밑밥을 뿌린다든지, 식사자리나 술자리 혹은 영화 관람 등을 할  수 있는 여유시간을 낸다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그저 야근에다가, 일주일에 서너번 윗사람들이 술자리를 만들면 중간관리자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불려가서 룸싸롱까지 끌려다니고, 그러다보면 일요일에도 혼자서 혹은 다같이 출근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여직원의 눈빛에 큰 의미를 두지 않으려 했지만, 어쩌다 회사내 모임 때문에 휴일 근무를 때려치우고 그 자리에 나갔는데 거기에서 활짝 웃으며 저를 반기는 여직원을 발견하게되면, 직장 동료들의 눈빛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곤 했죠. 그러나, 여직원의 눈빛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끔 일요일 오후에 일찍 끝내고 둘만의 술자리도 갖곤 했는데, 그럴 때의 눈빛도 참 강렬했죠.

 

비단 어느 한 여직원만 그런 게 아니라, 비록 저는 결혼을 했어도 저도 젊고 여직원들도 모두 다 젊다보니, 항상 붙어있는 사이에 눈빛만으로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사이가 되더군요.

 

그래서 인생사에 대한 고민도 서로 들어주고, 경제적인 문제점도 서로 조언해주고, 자연스럽게 부부 생활이나 가벼운 섹스 이야기도 나오고, 서로 웃으며 농담하다보면 등을 때린다든가 머리를 쓰다듬을 때도 있고... 

 

저는 여직원들에게 주어진 업무 외에 커피 배달이나 책상 청소는 하지말라고 했지만, 가끔 제 몸의 상황이나 제가 처해있는 상황을 보고는 여직원들이 스스로 제게 음료수 같은 것을 가져다 주거나 뭔가를 챙겨 줄 때가 있습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어느 관계에서나 그럴 때가 항상 있죠. 꼭 사랑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둘 사이에 다져진 정 때문에 부탁하지 않아도 상대방이 필요한 것을 해줄 때가 있습니다. 저도 여직원이 생리통으로 아파하는 모습을 보이면 부탁하지 않아도 진통제를 구해다주곤 했고요. 그러나 단 한번도 여직원들과 어떤 부적절한 관계를 맺어본 적은 없습니다. 그냥 눈빛만 느꼈다는 거죠.

 

장담하건데, 아마도 제가 원했다면, 제가 노력했다면, 그 당시에 여직원과 불륜의 관계를 맺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 혼자만의 착각일지도 모르지만요.

 

어쨌거나 안희정 사건이나 박원순 사건 등 요즈음 일어난 사건을 지켜보다 보면, 참 마음이 무겁습니다.

성추행이 어디에서 어디까지를 의미하는 것인지 의문스럽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을 행위가 어떤 상황에서는 문제가 되기도 하니까요.

요즈음 같은 시대에 만약에 저와 함께 있던 여직원이 저에게 앙심을 품고 제가 성추행을 했다고 주장한다면, 저로서도 그것을 부정할 방법이 없을 것입니다. 머리도 쓰다듬고, 등도 때리고, 착각인지 몰라도 사랑스럽게 쳐다보는 눈빛에 반해서 볼을 꼬집어 준 적도 있으니까요.

 

여러 명이 근무하는 부서 내에서 오직 둘만이 공통되는 업무로 동떨어져 있다고 느낄 때, 하루 종일 둘이 달라붙어서 어려운 업무를 처리해 나가면서 유대감을 느낄 때, 그러다보면 식습관이나 유머의 수준도 비슷해져서 별 것 아닌 것에도 서로 낄낄거리며 이해하게 될 때, 그럴 때 나온 자연스러운 반응이 이제는 성희롱이나 성추행으로 불려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그런 시대가 되었고, 저 또한 그런 비난에서 자유스럽지 못할 일들을 예전에 저질렀기 때문이죠.

 

박원순 시장이 떠나가며 자기 생명의 댓가로 우리에게 전달하려 했던 것이 무엇일지는 각 개인이 해석해야 하겠지만, 저로서는 그게 인권 신장을 빌미로 아주 삭막하고, 서로가 믿지 못하는 인간관계로 진입하는 그런 부정적인 쪽으로 해석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여성이 성폭력의 희생자가 되어서는 안되겠지만, 이제는 동일한 행위가 상대 여성의 의사나 감정에 따라서 감내할 수준의 업무관계나 사랑이나 불륜이 되었다가, 이후에 그 여성의 의사나 감정의 변화로 성희롱이나 성추행 심지어 성폭력으로 정의될 수 있는 그런 막강한 권력을 여성이 갖게 되었으니까 말이죠.

 

아무튼 이번 사건을 계기로, 어떤 조직에서든 남녀간의 인간 관계에서 남성이 차후에 일어날지도 모를 형사적인 처벌 혹은 대중적인 비난을 무릅쓰고서라도 여성에게 친밀감을 나타내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한 사회가 되었고, 저로서는 그것이 우리가 지향하는 사회인지 의문스럽습니다.

 

물론 그런 사건이 일어났더라도 소규모 조직 내에서 남녀간의 자연스러운 인간관계는 계속 유지될테고, 의도치 않은 불륜과 이루어지지 못할 애틋한 사랑도 계속 일어나겠지만, 전혀 그럴 가능성이 없는 인간관계에서만 어떤 아주 튼튼한 장벽이 설치될 것이란 점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서로가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아야만 하는 시대가 될테니까요.

 

제 경험으로는, 개방된 외국 사회에서 자유롭게 성에 대해서 말하고 행동하다 보니까, 우리나라에서 억압되어 있던 잠재적인 정신적 불만이 많이 해소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런 사회에서는 남녀가 우리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성적인 농담을 갖고도 성희롱이니 성추행이니 하는 부담을 갖지 않고 이야기하더군요. 몇 년 전에 필리핀 두테르테 대통령은 공개석상에서 강간을 당한 어느 백인 여성에 대해서 '자신이 먼저 맛을 봤어야 했는데'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해도 그냥 우스개로 치부하며 넘어가기도 했고,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도 후보시절에 자기 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맛있게 생기지 않았냐"고 언급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성적인 표현을 억누르면서, 남성에게는 일처 이첩 삼비를 허용하고 여성에게는 성적 순결을 요구하는 그런 이중적인 잣대로 살아온 우리 사회가 하루 아침에 개방적인 사회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개방적인 사회가 되지 않으면, 성추행이나 성희롱이라는 이 애매모호한 개념의 확대 해석이 우리의 숨통을 계속 막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박원순 시장은 죽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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