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안 오는 토요일이면
새벽마다 끌려가는
산자락의 텃밭.
비료, 농약을 안 주니
고추 대여섯개, 머윗잎과 호박잎이
일주일에 한 번 가져오는 수확물이다.
오늘도 다섯시 반, 알람 소리에 깨어나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밭을 향했다.
그런데, 이게 웬 일?
노룬지 고라닌지가 다녀가면서
옥수수밭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놨다.
잔손 안 가는 옥수수를 심어놨더니
장마에 먹을 게 없었는지
먹는 놈도 잔손질 안하고 먹고 갔다.
남은 옥수수라도 무사히 자라길 바라면서
오늘도 그냥 잡초나 뽑고
역시나 홀딱 벗은 지렁이나 구경하다가
장마로 열매를 맺지 않는
호박잎이나 따가려는데
몇 주 전에 두어 사발 가져다 둔 복합 비료가 생각났다.
다른 것은 몰라도
고추, 오이, 가지는 비료를 조금 주고 가야겠다
그런 생각에 비료를 챙기다가
문득 웃음이 나왔다.
게으름에 이런 저런 핑계로
몇 주 동안 옥수수밭에 비료를 안 줬는데
만약에 줬다면 얼마나 약이 오를까?
하는 생각이 쓰라림을 미소로 바꾼다.
고라니가 아니라 내 게으름이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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